하루 일도 모르는데 죽음 후를 어찌 알까?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이정오 단청장
하루 일도 모르는데 죽음 후를 어찌 알까?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이정오 단청장
  • 정칠임
  • 승인 2022.12.08 1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천상의 세계를 그리는 단청장, “지금 이곳이 천상·천국”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사찰이나 궁궐을 방문하다 보면 지붕 아래로 드러나는 단청의 화려한 문양과 색채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이런 전통의 단청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장으로 20대에 시작해 50년 단청을 그려왔다는 이정오 단청장.

그의 손길이 닿은 우리나라 크고 작은 전통 건축물이 1,000여 개라 하니 가히 단청 분야에서는 일가(一家)를 이룬 장인 중의 장인이다. 그의 대전 중구에 자리한 작업실을 찾았는데 ‘단청 속 경험하지 않은 천상 세계보다는 지금 사는 여기, 이곳에서 충실하고 착하게 살자.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극락에 이를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건물의 격과 쓰임에 따라 연꽃, 매화, 용 등으로 단청 그려 넣어

“청‧적‧백‧흑‧황 그 오방색 중 빨간색에 흰색을 섞으면 무슨 색이 나올까요? 그런 식으로 오방색을 다양하게 섞으면 한 스무 가지 색까지 나와요. 그 색들로 단청이 그려집니다.”

단청은 오방색으로 그린다는데 기자가 본 단청의 색깔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했다는 정말 문외한 적인 질문에 그는 친절한 답을 붙여줬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단청은 전통 건축물의 천장이나 기둥, 벽에 동양 오행 사상의 원리가 담긴 오방색 안료(顔料)로 다양한 무늬를 그려 넣어 장엄하고 아름다운 위용을 준다. 미적인 기능과 겸하여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목재를 보호하는 작용도 있다. 건물의 격과 쓰임에 따라 단청의 내용도 다양한데 사찰의 단청은 연꽃. 관련 경전에 수록된 문양, 성균관에는 암행어사를 뜻하는 매화, 궁전에는 다산과 장수, 평안에 관련되는 무늬를 주로 그려 넣는다니 감상에 참고할 일이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단청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 천상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지금 사는 이곳이 천상이고 천국”

단청의 소재는 천상이라고 한다. 경전에 보면 천상에는 극락문이 있고 백팔문을 지나면 아름다운 천상 세계가 있다는데 그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단청을 수없이 그려왔지만 나는 그 천상, 극락에 아직 가보지 않았고 죽음에 이르러야 경험할 수 있는 세계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생이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말한다. 지금 사는 이곳이 천상이고 천국이라고, 알지도 못하는 사후세계에 집착하지 말라고 강하게 얘기한다. 기자와 내가 이 인터뷰를 지금 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은 오후에 하기로 했었는데 당겨져 오전에 만나게 됐다. 하루 일도 모르는데 무슨 먼 후의 죽음 뒤의 일을 생각하느냐?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여 살면 나중에는 각종 종교계에서 말하는 극락‧천당‧천일국 그 어디든가 있을 것이다. 지금 기자님이 내게 밥 한 그릇 사 달라고 하면 제가 기꺼이 대접할 것이다. 그런데 불상 앞에 엎드려 부처님 밥 한 그릇 사달라면 백날 해도 이루어지겠나.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천상의 세계를 드러내는 단청을 내가 이어 전승하는 것이지 천상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는다. 지금 기자와 내가 있는 이 자리를 천상의 세계라 생각하고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학교·전통나래관 등에서 단청 체험 수업 열어 단청을 알려왔다… 대전시 무형문화재 연합회장 11년 역임

대전 제11호 무형문화재로 여러 방면으로 단청을 알리는 기회를 가져왔다. 문화재청 예산지원으로 학교나 유치원을 찾아가 문화재 수업도 하고, 대전 동구에 소재한 대전 전통나래관에서 시민 체험 수업도 한다. 1년에 20회 정도의 단청강좌를 여니 시민들이 단청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두 시간 수업인데 체험하시던 어른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한다.

대전시 무형문화재 연합회장을 11년 역임했는데, 재임 시절 동구 송촌동에 대전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전국 최초로 건립되었다. 시민들이 대전의 다양한 무형문화재를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대전 전통나래관도 개관되어 전통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하게 됐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최연소 단청기술자, 무형문화재로 살아온 지난날

1974년도에 최연소 단청기술자가 됐고, 2000년에 대전시 제11호 무형문화재 단청장에 올랐는데 외길을 걸어오는 동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2008년 서울 숭례문이 방화로 불이 나고 단청이 탈락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 일과 연루됐다고 의심을 받아 서울 경찰서에 가서 피의자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전국에 단청기술자가 300명도 채 되지 않고 이 라이센스가 귀하다 보니 그 당시 그 면허를 가지고 있는 기술자들은 모두 조사를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단청기술자가 소속돼 일하는 문화재전문관리회사가 예전에는 전국적으로 2, 30여 개 정도로 희소했는데, 지금은 많이 늘어 전국적으로는 3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안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한때, 서울 문화재관리회사가 공사를 잠식해 서울 일색의 단청이 그려져 건의해 반영됐다. 문화재에 지역색을 지키고, 원형 보전에 최고의 무게 둬야…

서울 중심 문화재관리회사 비율이 높다 보니 그들이 입찰을 넓게 따 전국적인 작업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 일대가 지역색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겼다. 보통 한국의 궁전은 날렵하고 미려한 선이 많은데 경상도의 건축물은 그에 비해 선이 무디다. 또 건축 양식도 지역마다 다른데, 서울의 단청기술자가 대구의 향교나 부산의 사찰 작업을 하다 보니, 그 선이 서울식으로 획일화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대구 지역의 향교 지붕이 서울의 경복궁 지붕처럼 보수됐다.

단청의 바탕색도 지역마다 달라지고 서울‧경상‧전라도 지역에서 즐겨 쓰는 색도 달랐다. 그런데 그렇게 전국이 획일화되고 있어 나는 그 점을 여러 번 건의했다. 다행히 그런 의견들이 반영되어 지금은 문화재 복원 때 지역 특성을 살리는 쪽으로 변화해가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는 현재 단청 관련해서 상시 자문위원으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문화재는 원형 보전에 최고의 무게를 두어야 한다.

옛날에는 지역의 문화재기술자가 전국적으로 움직이며 작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지역제로 운영되어 진다. 내가 대전에 소속되어 있으면 대전지역 작업만 가능하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남다른 총명함 보여… 조부모의 절에서 작업하던 김일섭 단청장에게 사사

조부모가 대구광역시 범어동에 ‘장수사’라는 절을 창건해 네다섯 살부터 그곳에서 자랐다. 잠결에 매번 새벽예불과 도량석하는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다 외워 줄줄 외고 다녔다. 한글도 모르는 어린애가 혼자 경전을 읊조리고 다니니 사람들이 신동 났다고 했다. 조부가 보던 토정비결 책자를 뒤적이고, 불교 서적도 대하다 보니 나는 어린아이인데도 애 어른 같은 면이 있었다.

절을 방문한 할머니들이 복채를 내놓으며 “어린 도사님, 사주 좀 봐주세요.”라고 부탁을 해오면 나는 장난처럼 이러저러한 말을 하기도 했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고(故) 김일섭 단청장(인간문화재 48호)이 이 절에 오시게 되었고 그의 작업을 지켜보다 제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의사 집에 의사 나고 판사 집에 판사 나듯이 늘 자고 일어나면 단청 그리는 그 모습을 봤고 자연스럽게 나도 그 길을 갔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대전무형문화재 제11호 이정오 단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