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사는 조상을 흠모하고 위업을 기리는 일
명절이나 기일(忌日)이 되면 많은 가정에서 차례와 제사를 지낸다. 범인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 지내고, 남들이 다 하니까 지내는 면도 있다. 현대사회로 와서는 막연한 의무감으로, 또 형식상으로 지내는 가정도 있을 것이다.
효학 박사 이성우는 봉제사가 일 년에 14번 있는 집안에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안 행사에 두루 다니며 유교문화가 스며들었다. 제사는 조상을 흠모하고 위업을 기리는 일로 매우 의미 있는 의식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내가 어디서 났습니까? 나로부터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상님들이 계십니다. 제사라는 오천 년 미풍양속은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혈족이라는 관계를 지키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가 영속되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박사는 제사문화가 간소해질 필요는 있다는데 동의했다.
“제사는 자기 조상을 흠모하고 위업을 기리는 일입니다. 정성으로 하면 되지 집안의 체면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죠. 다소 간소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제사에 대한 부담은 인식의 차이라고 한다. 조상을 모시는 것은 일 년에 한 차례인데 나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의 보은에 감사하며 정성껏 지내면 자신에게 이롭다고 했다.
그는 현재 가장동에 아내와 둘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 박사의 집안 제사는 8개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내가 이 제사를 다 준비하기에는 벅찰 수 있다. 이 박사는 제수 마련을 위해 직접 시장을 다니며 제사장을 본다. 밤을 손수 까고, 전 부치는 일, 산적을 만드는 일도 아내와 같이 한다. 제사음식 장만을 아내에게만 부담시켜서는 안 되며, 가족이 반드시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 아내는 결혼 당시, 집안의 봉제사가 많은 것을 익히 알고 결혼했고. 각오하고 들어왔어요. 부모님께서 집사람을 짝으로 점지해줬어요. ‘이 규수하고 선 봐라.’ 하셨을 때는 부모님께서 아내의 남다른 점을 보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결혼했습니다.”

일찍부터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가문의 자손이다
이성우 박사는 1952년생으로 충남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에서 출생했다. 시조로부터 경주이씨 평리공파 은촌공 종중의 74세 손 종손이다. 선친은 그에게 지행합일을 강조했고 만사 행동거지를 조심하기를 당부했다.
선친이 작고하자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조상님들을 모셔야 한다는 중압감이 더 컸다는 그는 종손이라는 책임감이 커서였을 것이다. 그는 선영을 모시고 경모재를 건립하고 흩어져 있는 후손들의 화합을 위해 불철주야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 박사의 17대조 이식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어모장군은 왕을 호위하는 조선 시대 서반 정3품 당하관의 최고 품계명이다. 이식(李植)은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켜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이를 폐륜으로 생각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영주 숙수사에서 복위를 논하는 등 금성대군(세조의 동생)과 함께 활동을 벌이다 역적으로 몰려 삭탈관직까지 당했다.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못하는 강직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식은 삭탈관직 후 은둔 생활 중 세조가 자신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식 장군을 복위시켰다. 그후 고종(高宗) 29년(1892년)에 충신으로 정려를 받기도 했다.

또 이 박사의 11대조인, 이동표는 낙향해 부모를 지극히 모셔 지역 어른들은 물론, 유림들의 귀감이 되고 칭찬이 자자했던 효자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20리가 넘는 천안 북면에 묘소를 써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암행어사가 탄복하여 그 효행을 조정에 올릴 정도였다.
임금은 이 내용을 접하고 교지와 더불어 이동표에게 벼슬을 내렸고, 사후에 유현들의 공의(公儀)로 사당(祠堂)도 건립하였다. 또한 그의 효심이 공자의 수제자로 효가 지극했던 증자와 같다 하여 마을이름을 ‘증자동’으로 칭하게 되었다. 또한 효를 행하는 자식들이 많이 산다하여 행정지명은 백자리(白子里)라 불리고 있다.
이 박사의 경주이씨 가문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시대를 이끌어 왔다고 그는 자부했다.
이러한 이 박사 집안은 많은 선행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난 2017년, 충남지역의 명문가 지정을 위한 문중 선발에 이 박사의 경주이씨 평리공파 은촌공 문중이 선정되어 충청지역의 대표적 양반가로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9급 공무원… 천안군청, 충남도청, 내무부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받아
이 박사는 천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74년에 고향 수신면사무소에서 9급으로 공직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천안군청(당시), 충남도청에서 근무하다 내무부(현, 행정안전부)를 모두 거쳤다. 지방행정과 중앙행정의 경험을 두루두루 쌓은 그는 마지막엔 충남도청에서 농정국장, 문화관광국장을 역임하고 퇴직했다.
공직생활에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겠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소개를 필자가 부탁했다.
“청양부군수(국장급, 4급)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완구 씨가 충남도지사로 와서는 나를 다시 공보관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공보관이라는 자리는 언론·홍보업무를 담당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일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기자들이 짓궂게 질문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로 곤궁에 빠뜨려도 유연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모시는 상관이 잘못하면 거침없이 지적하고 직언하는 사람이었다.
“감히 실국장들은 직언을 못했습니다다. 그런데 저는 했습니다. 나는 좌천이 될지언정 올바른 길이다 싶으면 직언을 해야 하는 성미입니다. 내 성향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강직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간언을 해온 내력이 있습니다. 경주 이 씨의 피에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그런 내력이 흐른다고 봅니다.”

그는 요즘 공무원들도 정의롭게 멸사봉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매사에 사가 아닌 공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국가적인 대의를 우선하고 지엽적인 것은 후순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평생의 경험을 살려 올바른 도정으로 가게 하기 위해 많은 직언을 하곤 했다. 사회의 안녕을 위해, 도민들의 이해와 복리증진을 위해서 공직의 실무자들은 직언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 목이 떨어져도 직언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길 줄 아는 공직자가 되라고 했다.

효학(孝學) 박사학위 취득… 지행합일 효 실천가
이 박사는 젊었을 적부터 문중의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챙기며 조상의 얼을 기리는 일에 앞장서 왔다. 학문적으로도 효 실천을 체계적으로 배양하기 위해 인천에 소재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입문하여 올해 학위 취득까지 이르렀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 학업에 대한 부담도 컸을 듯하다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잘 잊어버리지만 복습을 하면 괜찮죠. 공부 시간도 규칙적이지는 않았어요. 효 공부에는 유학의 사서삼경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고향 전답에 농사도 지으면서 늘 바쁜 일상이었지만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학업은 4년 과정이었는데 10년 기간 안에 마쳐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의지를 다지며 두문불출하고 박사 논문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선행 자료가 없다 보니 많은 난관도 있었습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조선시대 충청지역 경주이씨 가문의 효행사적에 관한 연구’는 충청지역 효자들의 효행 내용과 그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효 사상에 관한 다양한 의미와 효의 형태, 실천 사례들이 소개된다.
그는 대전 효지도사협회 부회장으로서 효 지도사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효‧인성교육원의 부원장으로서 여러 복지관, 경로당 등에 웰다잉 강사도 하고 있다. 한국효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효행열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삼대가(三代家)효’ 노인 강사로도 일한다.
그는 정녕 이 시대의 올곧은 유학자이며 그 전승자이고 싶어 한다. 유학이 진실되고 정의롭고 올바른 길임을 널리 알리고자 쉼이 없다. 또한 변하지 않는 가치인 효를 학문으로 심화해 현대인들에게 효 마인드를 재고해 주려 한다. 효 교육의 전도사로서 인생 후반전을 뛰고 있는 이성우 효 박사를 진심으로 응원해 본다.

이성우 박사
전) 충남도청 문화체육관광국장
대전효지도사협회 부회장
효인성교육원 부원장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박사(효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