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에서 이임식에서 이임사 대신 색소폰 연주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문화 속에 뛰어들기 위해, 색소폰을 잡았다”

그는 2022년 6·1지방선거에서 세종시장에 재도전해 기어이 승리했다. 2012년 세종시 초대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 후, 꼭 10년 만이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 돌아와 선거에 나와도 세종에서는 민주당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 보수의 험지(險地), 세종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당당히 당선된 최민호 시장. 시민들은 행정가로서 그의 뚝심과 열정·추진력을 알아봐 주었고, 세종을 새롭게 변화시킬 장본인으로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지난 2012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세종시 초대시장에 출마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정치 신인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3위에 그쳤다. 낙선의 고배를 뒤로하며 고향인 대전이 아닌, 세종시 연동면에 삶의 터를 잡았을 때는 와신상담하며 오로지 세종에서 재도약의 힘을 다지려 함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2017년 이후 정치와 멀어졌다. 가족과 함께 시간도 보내며 집필 활동을 하고 후학 양성을 위해 대학 강단에도 섰다. 2019년 ‘조국사태’ 발발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정치의 불씨를 발견했고 그 불길은 잠들 줄 몰랐다.
그는 결단을 내렸고, 2021년 국민의힘 세종시 갑 선거구 당협위원장을 맡아 정치 복귀를 선언했다. 같은 해 7월, 세종시당 위원장에 당선됐고 국민의힘 정책위 부위원장과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추진위원 등을 맡으며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지난 3월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세종시 총괄선대위 위원장을 맡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위해 주야로 동분서주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6·1 선거에서 민주당의 텃밭이라고 알려진 세종시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시장에 당선되자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의 지나온 행적을 반추해보다 보면, 그는 좀 달랐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들을 ‘가능’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 출범하는 최민호 시장 체제하의 세종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들의 수많은 ‘가능’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또한, 최민호 시장 특유의 진취적 기상과 치밀한 지략으로 세종시에 기적적인 성과물들이 이어지길 바라며 그의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불가능을 넘어 ‘가능’에 도전하다… 충남도 재직 시절 ‘안면도국제꽃박람회’
그는 2002년 충남도에 근무하면서 ‘안면도국제꽃박람회’ 운영본부장을 맡았다. 충남도가 꽃 문화의 확산과 화훼산업의 발전, 안면도의 국제관광단지화 등을 위해 대대적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충남 태안군 안면읍 꽃지 해수욕장에서 ‘꽃과 새 문명’이라는 주제로 처음 열렸는데, 국내‧외 수백 개 화훼업체가 참가하는 대규모의 행사였다.
그는 이 박람회의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우려가 많았는데, 전문가들마저 부정적이었다. 해수욕장의 염분 때문에 행사장에 개화가 안 될 것이라는 일색이었다. ‘사업은 실패하고 운영본부장인 최민호는 부실 회계처리로 감사를 받거나 사표를 쓰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말도 돌았다.
하지만 그런 주위의 여론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의 철저한 사전 준비 자세와 특유의 뚝심으로 밀고 나간 이 사업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성공리에 마쳤다. 세계 32개국이 함께했으며 178개 업체의 참여로 임대사업 수익 등 221억 원의 흑자를 거두었고, 164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기염을 토했다. 잠자고 있던 안면도, 그 천혜의 수려한 경관이 이 행사로 국제적 휴양관광지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또 안면도가 서해안 문화 관광의 중심 지역으로 확고히 자리 매김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을 듣는다.

‘한예종’ 강좌에서 문화 재발견… “세상에 참 아름다운 것이 문화다!”
그는 2003년, 행정자치부 지방분권추진기획단 단장직에 있을 때, 한국예술종합대학 CEO 과정을 들었다. 이 과정은 음악, 미술, 발레, 국악, 심지어 와인 강좌까지 진행됐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예술 강좌와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을 만났고 경험했다.
그는 그동안 행정직 공무원을 해왔기에 ‘문화’라 하면 그저 관료적 관점에서만 봐왔는데, 한예종 과정을 마치면서 문화라는 것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 과정을 마치며 제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행정, 정책, 기획…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세상에 참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구나.’ 행정의 관점에서만 문화를 보아 왔는데, 이제 문화적 관점에서 행정을 바라보자! 라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한예종을 졸업하며 그는 문화적 관점에 심취해 졸업 리포터를 썼다. ‘축구 경기의 음악적 표현을 위한 심포니 작곡에 관한 상상적 제언’이라는 제목의 이 리포터는 그의 독창적이며 놀라운 상상력이 발휘됐다.
“저는 당시 문화의 충격에 빠져버린 이후, 축구 경기를 보더라도 경기장의 구획선이 음악의 오선지로 보였고, 운동장을 뛰는 선수는 음표로 보였는데, 음표는 자기 고유의 음역이 있듯이, 선수도 그 포지션별로 스트라이커, 미드필드, 센터백, 풀백으로 나눠, 자기 고유의 음역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이치가 들여다보였습니다.”
현악기 중 바이올린이 음력이 높고, 첼로가 음력이 낮듯이. 축구 선수들을 음력으로 따지면 스트라이커는 바이올린이 되고 미드필드는 첼로다.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선율이다. 선수가 움직이는 45분 동안을 선율로 오선지에 그대로 옮기면, 축구 경기로 교향곡 하나를 작곡할 수 있겠다는 발상까지 이른 그는, 실제로 리포트에 오선지를 그렸고, 음표까지 그려 넣어 졸업 리포트를 제출했다.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문화 속에 뛰어들기 위해, 색소폰을 잡았다”
음악적 화성은 잘 모르지만, 그는 그러한 발상에 작곡표까지 만들어 붙였다. ‘축구 경기를 음악적으로 해석해 교향곡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발상을 현실화시킨 한예종 졸업 리포터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졸업 대표 연설을 그가 했는데 청중은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행정을 해 나갈 때, 문화적 관점이 없기에 멋없는 행정이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도시는 관료적 생각에 빠져있는 딱딱한 도시가 됩니다. 우리가 문화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가 아닌, 행정이 문화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한예종에서 참다운 문화를 경험한 그는 실천하고 싶어졌다. 말로만 ‘문화적 관점에서 행정을 보겠다’고 하기 보다 실재 문화 속에 뛰어들어야 했다. 한예종을 졸업한 다음 날, 그는 바로 색소폰을 손에 잡았고, 배우기 시작했다. 공직자라 연습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2008년 충남도에서 행정안전부로 발령받아 충남도청에서 이임식을 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의 이임사를 제가 지켜봤지만 다 비슷한 말이더라. 저는 제 취미이자 특기인 색소폰 연주로 이임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첫 곡으로 ‘광화문 연가’가 연주됐고, 두 번째로는 그의 비전과 이상을 찾는 의미의 ‘오버 더 레인보우’가 연주되자 청중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앙코르 요청도 쇄도했다. 마지막 앙코르 연주는 ‘마이웨이’로 장식됐다. 그의 신선하고 파격적인 ‘색소폰 이임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며 그 유명세를 탔다.
그의 문화에 관련된 일화를 듣다 보니, 남다른 상상력과 실행력이 꽤 돋보인다. 또한, 그는 말만 앞서는 정치인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대다수 우리는 상상에서 그치거나 그 상상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상상한 것을 현실화시키고 실행하는 부지런함과 열정, 끼를 가진듯하다.

시민 ‘문화 생활화’의 시작… ‘음악 살롱 석가헌(夕佳軒)’
그는 시장으로 출범하며 세종시에 거는 슬로건으로 ‘풍요로운 삶, 품격 있는 세종’을 선택했다. 그 구호는 그의 개인적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 1차 적으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해서 교양도, 품격도 없이 산다면 인간적 삶이 될 수 없다. 풍요는 경제적 영역이고, 품격은 그 사회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매사 언사에도 풍요와 품격이 함께 깃들어야 한다.”

그의 이러한 평소 철학이 뒷받침돼서일까. 품격 있게 살겠다는 그의 철학은 ‘음악살롱’이라는 작은 시작으로부터 결실을 보고 있다. 2006년 8월 그가 미국 워싱턴 연수를 마치고 충남도 행정 부지사로 부임하자, 주변인과 지인들이 축하연을 해 준다며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부지사 관사에서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자며 시작했는데 일이 커졌다. 그때 모인 분들이 70여 명이나 돼, 강당을 빌려서 축하 행사를 했다. 각자 먹을 음식을 준비해 와서 나눠 먹으며 공연도 했다. 저를 아껴주시는 문화인들이 악기를 가져왔고, 해군 밴드도 보내줘 문화공연을 재밌게 두 시간여 즐겼는데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축하연은 처음 봤다’며, 좋은 것은 매달 한 번씩 하자는 제안이 있어, 모임이 여기까지 왔다.”

‘음악살롱 석가헌’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석가헌(夕佳軒)이라는 명칭은 한 중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써 전달한 글귀인데, ‘사람은 저녁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 뜻을 전해 듣고 그가 감명을 받아 음악살롱의 이름으로 제안했다. 10여 년 진행해온 이 음악 행사는 매달 마지막 째 주 토요일 저녁,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석가헌은 ‘청렴’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정신을 기본으로, 어떤 규정도 회원자격도 없이 그저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그 취지에 공감하는 시민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들의 자발적인 회비로 운영되며 공연에는 다양한 뮤지션과 예술인들이 참여하는데 매회 참여회원은 70명에서 100여 명 수준이다.
오는 7월 23일 석가헌 행사는 세종시에서 열릴 예정이다. 석가헌은 대전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동선에 따라 공간이 옮겨져 서울이나 세종에서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회원은 대전, 세종, 서울 등으로 다양하다.
그는 이러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문화행사가 세종 곳곳에서 다채롭게 벌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도시는 그 정체성에 걸맞은 영혼을 가져야”
가락마을 고운동, 범지기마을 아름동, 도램마을 도담동, 새뜸마을 새롬동, 첫마을 한솔동… 슬기로, 새빛중학교. 가람교, 학나래교 등등…….
세종시는 한글 도시다. 세종시의 행정구역명과 마을 이름, 도로명, 학교명, 다리 이름을 듣고 있자면 참 정겹고 고운 느낌이 든다. 세종시는 세종대왕의 훌륭한 업적과 창조 정신을 본받고자 ‘세종’이라는 도시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시 곳곳에 한글 이름을 명명 했다.

그는 2011년 5월부터 11월까지 국토교통부 산하 중앙 행정기관인 제5대 행복청장 직에 있었는데, 세종시의 학교와 도로, 다리, 동(洞) 이름 등이 우리말로 지어진 것은 최 시장의 아이디어의 결과다. 세종시는 출범 준비의 일환으로 주요 시설물에 대한 명칭 제정이 필요했다. 제정 방향의 일관성과 연계성을 위해 실무협의를 통해 행복청이 명칭 제정의 총괄을 맡기로 했다. 그는 2011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국민제안을 받아 5개 분야 1,066개의 한글 이름을 마련해 도시에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도시라는 것은 도로를 만들고 아파트를 짓고 상가를 들인다고 훌륭한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 걸맞은 영혼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종시는 어떤 영혼이 감도는 도시이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한 그다. “외국에 나가보면 도시마다 다 개성이 있어요. 도시의 특성과 성격을 ‘영혼’이라 한다면, 세종시의 영혼은 세종대왕의 창조‧개척 정신입니다. 세종은 행정수도니 애국‧애민 정신도 깃들면 더 좋겠죠. 그런 고민 끝에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한글 이름을 짓자고 결정했습니다.”
시민들은 그 한글 명칭들이 세종시의 또 하나의 명품으로 자리 잡아, 도시 이미지와 품격을 한껏 높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세종시 시내버스 요금 무료화?
세종시민들의 가장 큰 민원 중의 하나는 느리고 불편한 도시교통 시스템이다. 가다, 서다를 자주 반복하는 교통 시스템으로 신호주기가 길며, U턴이 어려워 이동시간이 더 길어지는 데다 너무도 많은 볼라드와 펜스 설치로 시민 불편을 초래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다.
최민호 시장은 지난 선거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여유로운 아침 시간 20분을 돌려주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관내 시내버스 요금 무료화 시행 검토 및 출퇴근 시간 BRT 등 광역버스 요금 할인을 내세웠는데 필자는 실현 가능성을 물었다.
그는 세종시 교통 문제가 심각하다는 민원이 많은데 해결할 방법은 단 두 가지라고 한다. 도로를 넓히거나 차량을 줄이거나인데, 도로 넓히기는 힘드니까 대중교통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도 안 해본 거지만 해봐야지요. 실행하면 전국 최초가 될 텐데, 세종대왕의 창조 정신, 개척정신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다만 1년에서 1년 반 정도의 준비 기간은 필요합니다. 버스노선이 다 재조정 돼야 하고, 재원도 마련해야 합니다. 버스회사와 노선 협의도 해야 하는 등 해결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도시 전체에 굉장한 혼란이 올 수 있으니 시설을 정비해 가며 착실히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자연인 최민호,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기쁜 것은…
살면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웠을 때는 언제인지, 개인적인 희로애락을 물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건… 당연히 과거,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입니다. 그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도전했다 실패했을 때가 제일 슬퍼요. 문학적으로 변용하자면 자기가 사랑했던 것과 헤어질 때도 가장 슬픕니다. 부모님, 애인, 내가 사랑했던 일과 떨어질 때도 그렇고요……. 저는 공직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해 이것과 헤어질 때 가장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반대로 그가 가장 기쁘고 행복할 때는 사랑하는 것과 함께할 때가 가장 기쁘다 했다. 결혼식 할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소중한 사람, 일과 만날 때라 했다. 20대에 공직에 들어서 쉼 없이 달려왔고, 또 그가 앞으로 달려가야 할 일도 크고 멀다. 그렇다면 단련된 심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일 줄 알지만 그의 건강관리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건강관리……, 글쎄요 지금은 특별히 없고 열심히 일만 할 뿐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기 바빠요. 옛날에는 운동을 좋아해 배드민턴, 인라인스케이트도 많이 즐겼는데, 코로나가 시작되고부터는 3~4년간 운동을 영 못했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일찍 나오고 늦게 들어가지만, 아내와 대화는 꼭 하고자 한다는 최민호 시장. 그가 정치를 재개할 때, 말릴 줄 알았던 아내는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며 용기를 주었고, 서울에 있는 딸과 미국에서 MIT 교수로 있는 아들에게 아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자 했다. 서울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딸과 미국에 있는 아들은 거의 매일 안부 전화를 해와, 부부는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한다. ‘아침 식사는 집사람이 만들어 주는 대로 대중없이 잘 먹는다’는 소소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일복 많은 그는 가정까지 다복해 ‘참부자’인 듯 보였다.
최 시장은 2000년, 현직 공무원에 있으면서, 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공무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을 펴냈고, 2009년, 소청심사위원장 재직 무렵 경이로운 대자연의 세계 등 식물과 인간의 소통을 중심 소재로 한 지적 스릴러 <아웃터넷>이라는 소설을 펴내 주목받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해 본지 기자가 방문했을 때, 그는 7월 1일 취임식을 코앞에 두고 넘쳐나는 방문객과 인수위 등 신임업무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5분, 10분을 다투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시간을 내어 본지에 인터뷰 시간을 내어준 최 시장께 감사드린다.

최민호 세종특별자치시 시장
출생: 1956년 (만65세)
학력사항
대학원 행정학 박사(2004년)
대학원 법학․정치학 석사(1993년)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1986년)
법학과 학사(1980년)
주요경력
2022년: 세종특별자치시 시장
2021년: 국민의힘 세종특별자치시당 위원장
2020년 ~ 2021년: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5년 ~ 2020년: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2015년 ~ 2018년: 배재대학교 석좌교수
2015년: 국무총리비서실 비서실장
2011년: 제5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청장
2009년: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2008년: 행정안전부 인사실장
2006년: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2003년: 행정자치부 지방분권추진기획단 단장
1981년: 제24회 행정고등고시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