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학의 거장 나림 이병주(1921~1992) 선생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이병주 문학 영호남 학술세미나>가 지난 4월 9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관장 최영욱)에서 열렸다.
이병주 선생 타계 30주기를 맞아 (사)이병주기념사업회(공동대표 이기수, 김종회)가 주최한 이번 학술세미나는 <이병주 문학 다시 보기>라는 주제로 국내의 저명한 문인과 학자, 영호남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생전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연구 분석했다.
이날 행사는 김주성 작가(문학박사)의 사회로 시작돼, 탁인석 광주문인협회장, 이달균 경남문인협회장, 정관웅 전남문인협회장, 이필수 하동문인협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김종회 공동대표(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의 기조 강연이 펼쳐졌다.

또, 김용희 소설가(평택대 교수)를 좌장으로 박덕은 전 전남대 교수(문학박사), 최현주 순천대 교수, 이남정 시나리오 작가(창원대 교수), 이승하 중앙대 교수 등의 주제발표가 차례로 진행됐다.
주제발표 후에는 김정희 시인, 심경숙 작가, 조평래 소설가, 임정연 안양대 교수 등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외에도 최만진 이병주 선생 100주년 북천면 추진위원장과 김용국 전 전남문인협회장, 박신영 국제펜클럽 광주지회장, 김남호 시인(문학평론가) 등 영호남 지역 문인 및 교수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기조 강연을 통해 이병주 문학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며, 이병주 선생은 80여 권의 소설과 30여 권의 에세이 등을 저술한 당대의 걸출한 작가이며, 한국문학에 큰 족적과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 작가의 첫 작품은 1965년 발표한 <소설-알렉산드리아>로 알려져 있다며, 작품 구성은 산뜻하면서도 품위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구조, 낯선 이국적 정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누구든 쉽사리 접근할 수 있도록 용해하는 힘, 부분 부분의 단락들이 전체적인 구조와 잘 조화되면서도 수미상응하게 정리되는 마무리 기법 등에서 작가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68~1970년 '월간중앙'에 연재된 <관부연락선>은 일제 말기의 5년과 해방공간의 5년을 소설의 무대로 하면서, 일제하의 일본 유학과 학병 동원, 교우관계 등 작가 자신이 걸어온 핍진한 삶의 행적을 함께 담고 있다고 전했다.
또, 1972~1977년 '세대'에 연재한 <지리산>과 1974~1979년 '신동아'에 연재한 <산하>, 1976~1982년 '문학사상'에 연재한 <행복어사전>, 1979~198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바람과 구름과 비> 등의 장편소설은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당대의 인기 작가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밝혔다.
이병주 선생은 분량이 크지 않은 작품을 정교한 짜임새로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부피가 많은 대하소설도 유연하게 펼쳐나가는데 탁월한 작가라고 평했다.
일찍이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그 마력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병주 선생은 자신의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라고 써 붙여 두었는데,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그의 글의 전개를 보면,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생동력과 장쾌한 스케일 등이 그를 한국의 '발자크'라 부르는 것도 그리 어색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회 평론가는, 한 작가를 그 시대의 교사로 여기고, 또 그의 문학을 시대정신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풍향계로 내세울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정신적 활력을 가진 공동체라 할 수 있다며,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제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주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아프고 슬픈 여러 사건이 휘몰아친 격동의 현장이었으며, 그는 이 고난의 시기를 안으로 삭이고 문필로 승화하여 특별한 체험적 진실과 역사성을 확립해 놓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가을 이병주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이어 금년에 열린 타계 30주기 학술세미나는 이병주 선생을 추모하는 한편, 이 시대 독자들에게 뜻깊은 소설 읽기의 분위기를 고취 시키고, 이병주의 삶과 문학을 되새겨보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최현주 문학평론가(순천대 교수)는 이병주의 역사소설은 1930년대 식민지 시기부터 1940년대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 4.19와 5.16 이후의 한국 근대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역사소설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와 공감의 정치학을 구현해내고 있고, 국가폭력의 부조리를 해부하고 폭로함으로써 진정한 국가, 국민, 이념, 정치, 인간다움의 진정한 가치를 고민한 인고의 기록들이라고 밝혔다.
그가 좌우의 이념으로 인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음을 원체험으로부터 기원한 이념에 대한 부정과 불신의 상념과 감상들이 <관부연락선>과 <지리산> 등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언론인으로서 5.16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글을 쓰게 되고, 결국엔 문제가 되어 2년 7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그를 언론인에서 소설가로 변신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최 평론가는, 이병주 선생은 일본 유학, 중국 학병, 교사, 교수, 언론인, 투옥 생활, 민의원과 국회의원 출마, 낙선 등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특히, 필화 사건으로 박정희와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소설 쓰기를 통해 그의 정치적 이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거라는 통찰의 인식이 작가에게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소설 쓰기를 통해 그 어떤 사실 기록이나 논설보다도 왜곡된 역사의 현실을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음을 간파했을 것으로 추론했다.
이병주 작가는 <지리산> 에필로그에서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라고 기술했다며. 그가 가려진 역사를 현재화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만의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을 갖고, 역사의 현실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인간적 연민 등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 선생은 진주공립농업학교와 일본 메이지대 문예과에서 수학한 후 1944년 중국 주둔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집됐다.
광복 후 귀국한 선생은 진주농과대학(현 경상대), 해인대학(현 경남대), 교수를 거쳐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 부산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했다.
1961년 필화사건으로 2년 7개월을 복역했고, 이후에 한국외국어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했다.
1965년 마흔 내 살의 나이에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천여 매를 써내는 초인적인 집필활동으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77년 장편 <낙엽>과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문학작가상과 한국창작문학상을,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개와 용기를 지닌 언론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은, 그의 문학정신에 튼튼한 자양분을 이루며,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탁월한 평가를 받게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공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 정부수립, 6.25 동란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은, 한 지식인으로서 누구보다 우리 역사와 민족의 비극에 고뇌하게 했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동력이 되었다.
등단 이후 이어진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행복어사전>, <소설 남로당>, <그해 오월>, <망각의 화원>, <그들의 향연>, <어느 인생>, <별이 차가운 밤이면>, <타인의 숲>, <그를 버린 여인> 등의 중,장편(연재 소설)과 「목격자/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철학적 살인/ 수선화를 닮은 여인/ 어느 독신녀/ 서울은 천국/ 빈영출/ 박사상회」 등 단편 소설, 「선택의 자유를 위한 추구/ 학처럼 살다간 김수영에게/ 연애론을 쓸 자격이 없다/ 그리운 마음과 웃는 얼굴/ 못다한 사랑의 낙서/ 문학과 철학의 영원한 주제/ 정치 열풍의 현장에서/ 섬세한 무늬 속에 불타는 애정/ 소설창작법/ 독서하는 방법/ 지리산 남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 문학이란 사랑을 찾는 노력/ 사랑받는 이브의 초상/ 아담과 이브의 합창/ 나 모두 용서하리라/ 현대를 살기 위한 사색/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 등 에세이집, 「젊은이여 인생을 이야기 하자/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독서와 지적 생활/ 길을 묻는 여성을 위한 인생론/ 홀로와 더불어」 등 공저 에세이집들은 작가의 문학적 지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탄탄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으로 소설문학 본연의 서사성을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역사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으로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그의 문학은, 역사의식 부재와 문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이병주기념사업회는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2005년에 출범하여 2008년 이병주문학관을 개관했으며, 그동안 국제문학제, 학술세미나, 국제문학상 시상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쳐오고 있다.



최형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