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 정다은 기자
  • 승인 2022.02.0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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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들기름 사용한 ‘엄마의 손맛’ 명품 수제김… ‘무방부제’, ‘무색소’, ‘무인공향신료’
박향희 김,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한라에서 백두까지’ 박향희 김을 알리기 위해 기업 이름도 ‘한백식품’으로 지었다.

박향희 대표는 청주 육거리시장에서 노점상으로 시작해 오로지 김 하나만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까지 하며 전 세계적으로 맛과 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한백식품은 제1공장에 이어 지난 2019년 12월 괴산 수산물거점단지에 제2공장을 마련하고 본격 운영에 돌입했다. 기존 제1공장과 투 트랙(Two-track) 전략으로 생산 효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제1공장에서 김자반, 김스낵, 기름류 등을 생산하고 제2공장에선 수제 김과 조미김을 생산한다.

박향희 김은 한 장 한 장 손으로 구워 한국전통의 맛이 살아있는 명품 수제 김이다. 명품 김을 만드는 박향희 대표 또한 명품인이다. 그녀의 명품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Q. 김 사업을 시작한 동기는?

A. 처음에 김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나라 김이 너무 맛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엄마가 들기름을 발라 구워준 김은 무척 맛있고 귀해서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우리가 몰래몰래 꺼내먹곤 했지요. 엄마가 김 만들어주는 날은 기분 좋은 날이었을 정도였는데 언젠가부터 김이 흔하게, 어디에나 널려있는 게 돼버렸어요.

34살 당시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 빚이 3억 정도 됐어요. 아이도 세 명이고 평생 벌어도 못 갚겠더라고요. 밑천도 없고 직장을 다녀가지고는 평생 벌어도 아이 셋도 못 키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밑천 없이 장사하는 게 어떤 것이 있는지 찾다가 장날 노점은 할머니들이 대야 하나 놓고 장사를 한다는 걸 떠올렸어요. ‘전통시장에 가야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전통시장에도 정해진 자기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 전통시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정보를 얻을 곳이 없었어요. ‘시장에 취직을 하면 알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교차로를 뒤지기 시작했죠. 그러다 전통 5일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걸 보고 연락을 해 취직을 했어요. 영월, 횡성, 원주, 이천, 충주를 5일장마다 돌아다녔어요. 취직한 곳이 김 장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김이 너무 잘 팔리는 거 아니겠어요? ‘이것 봐라, 왜 이렇게 잘 팔리는 거야? 뭐야?’ 그리고 옆에 생선장사도 너무 잘 되는 걸 보고, 둘 중 가벼운 김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김 장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면서 어렸을 때 내가 먹던 그 귀하던 김 맛을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원주 전통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는 시장에서 동창을 만났던 적도 있어요. ‘향희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시장바닥에서 주인도 아니고 남의 집에서 일한다’며 길바닥에서 펑펑 울고, 우리 언니도 와서 ‘이게 뭐냐, 집안 망신이지 이게 뭐 하는 거냐’고 했어요. 언니들도 있고 집도 잘 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저한테 가게를 차려준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처지가 바닥까지 내려가다 보니 가족들한테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땅바닥까지 내려가보니까 나를 자존심 상하게 하고 슬프게 해서 다 필요 없고, 아무 도움도 안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저는 기독교인이니까 ‘하나님만 저를 도와주세요. 더 이상 사람의 도움은 아무것도 안 받겠습니다.’라고 다짐했어요. 사람에게 도움을 받다 보니 동시에 상처를 함께 주는 거예요. 어렸을 땐 “우리 향희야.”, “우리 복둥이야.” 이런 소릴 듣고 자랐는데, 귀했던 딸이 망하니 갑자기 내 이름이 향희년이 됐고, 있는 구박 없는 구박을 다 받았어요.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안 받고 내 힘으로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야 하나만 가지고 장사하는 노점을 찾아가서 노점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리 뚫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고향에서 장사를 시작하면 사람들과 가족한테 미안하고 나도 친구들 만나니까 우울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노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국에서 시장 물이 어디가 좋은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안산시장과 청주시장이 물이 좋다고 대답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청주로 가기로 정하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청주 공기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어요. 버스 문이 열리고 계단 하나 내려왔는데 첫 느낌이 엄마 품처럼 푸근했어요. ‘나 여기 살아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에는 ‘사창시장’을 찾아갔어요. 조그맣더라고요. 거기서 어느 시장이 큰지 물어봤더니 육거리시장이 크다고 하기에, 육거리시장에 자리 하나 얻어내려고 쫓아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자리 하나 달라고 말했더니 상인회장이 웃어요. 대기인원만 10년 전부터, 20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도 물이 좋았으니 당연히 자리도 없을 수밖에요. 저도 급한 처지였으니 죽기 살기로 자리 하나만 달라고 떼를 썼죠. 제가 상인회장님께 이렇게 말했어요. 나중에 그분은 도의원이 되신 분인데, “회장님, 전통시장이 어려워져가는 것은 어르신들만 많아서 그렇습니다. 전통시장도 저처럼 젊은 사람을 유치해야 시장이 삽니다. 저는 부지런합니다. 장사도 잘합니다. 저를 시장에 넣어주세요.” 열정적으로 한 달을 쫓아다니며 설득하다 보니 자리 하나를 얻게 됐어요. 그렇게 어렵사리 조그만 자리 하나를 얻어서 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김 굽는 연기가 하필이면 한복집 골목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이 들기름 쩐 연기가 한복에 배니까 눈만 뜨면 저리 가라, 이리 가라 맨날 구박받는 신세가 됐어요. 밤에 잠들면서 ‘내일이 안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어요.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아침이 무서웠어요.

그때 당시 빚쟁이들이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갈 정도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본가에 두고 왔었어요. 성공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청주 오면서 가족들한테 연락도 안 하고 찾지 말라고 하고 떠났었거든요. 그 후 1년 만에 전화해서 한 달에 100만 원씩 부쳤어요. 먼저 은행 빚부터 갚았어요. 그 다음에 사채를 갚고, 4년차에 애들을 한 명씩 데리고 왔어요. 지금은 다 데려왔죠.

Q. 시장 한복집과의 마찰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A. 그렇게 저를 괴롭히던 일은 내 인생에 나를 도와주는 도화선이 돼요. 시장에서 일한 초기에는 맨날 구박을 받았어요. 시장에 자리를 받아 김 가게를 처음 시작한 날이 7월 말일이었는데 그때 날씨가 35도 정도 됐고 김 굽는 맥반석 온도가 400도 정도였어요. 햇볕이 내리쬐는데 파라솔도 못 펴게 했어요, 근처 가게들 간판 가린다고. 모자 하나 쓰고 김을 굽고 있으면요,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앞이 노래졌어요. 회장님이 오셔서 “김 장사 앞에 가서 덥단 말 하지 마, 알았지?” 하고 가실 정도였어요. 게다가 그때는 놔두고 온 아이들 생각하면 물값도 아까워서 물도 사 먹을 수 없었어요. 생수를 살 돈이 너무 아까워서 아침에 출근할 때 물 한 병 가져와 그걸로 하루 버텼어요. 그렇게 힘들 때인데 연기 난다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구박을 받았죠.

하루는 회장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나는 김 장사하는 네가 너무 예쁜데 도저히 민원이 와서 안 되겠다. 품목을 다른 것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다른 자리로 가야겠다.” 하시는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가나요?” 물었더니 따라와보래요. 회장님을 따라 간 곳은 시장도 아닌 식당들만 있는 뒷골목이었어요. 다 망해서 나왔다는 자리였는데, 거기로 가라는 거예요. 하루만 저한테 시간을 달라고 하고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그때 들어갔던 한복집 골목은 좋은 자리예요. 20여 년 전 그때 하루에 6만 1000원 팔았어요. 그런데 이쪽으로 와서는 첫날 1만 5000원 팔았어요. 그 정도로 벽지였는데, 하루는 진지하게 생각해봤어요. ‘박향희, 너 어떻게 할 거야. 핀 장사로 바꿀 거야? 저쪽으로 가서 김 장사 할 거야?’

그때, ‘이 김은 안 될 수가 없어.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데 안 될 수가 있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야.’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옮겨서라도 김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뒷골목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거기는 너무 손님이 없어서 두 시간마다 한 사람 볼까 말까 할 정도였어요. 게다가 천막 칠 돈이 없어서 현장에서 쓰는 BT아시바라는 등 달 때 올라가는 사다리, 넓은 기둥이 있고 칸칸이 된 장비가 있는데, 그 한 칸에 비닐을 치고 파란색 노끈을 감아 네 기둥을 막아서 김을 진열해뒀어요. 그러니까 건너편 보리밥 식당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한테 와서 ‘불쌍한 사람 같은데 나가랄 수도 없고 어떡하냐, 우리 집 앞에 어질러놓고 지저분해서 어떻게 하냐’ 할 정도로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에요.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디 가면 7, 80은 받지 않니?” 그 사람이 생각하기엔 이상한 사람 같았던 거죠. 식당이나 공장을 가면 월급으로 7, 80만 원은 받을 텐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의아했을 거예요.

시장에서 하루 1만 5000원을 팔면 적자였어요. 손으로 굽는 건 50%가 남아요. 그런데 당시 가스가 1만 3000원이었어요. 5일에 한 통씩 썼기 때문에 몇천 원 못 번 셈이 됐죠. 계산해 보면 한 달에 50만 원도 못 벌잖아요. 어디 가면 60만 원 더 벌 수 있는데 누가 볼 땐 제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거였죠. 그러니까 주변에서는 “너 젊은 게 왜 이러니?”, “돈 벌러 가”, “왜 이러고 있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언니, 70이나 80으로 될 것 같으면 제가 진작 갔죠. 난 그걸로 안 돼요.”

그때는 이미 아이들 학교로 빚쟁이가 찾아갔을 때였어요. 아이들을 전학시켜 데리고 오면 빚쟁이가 따라올 정도였으니까 내가 빚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이가 세 명이니까 단순계산으로 빚 500만 원씩 갚아나가고 아이 셋에 300만 원, 생활비 100만 원…, 매월 1000만 원을 벌지 못하면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난 목표가 처음부터 1000만 원이니까 애당초 직장생활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그래서 김 장사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일을 시작하면서 나하고 약속을 했어요. ‘박향희, 1년만 너한테 시간을 줄게. 반드시 1년 뒤에는 월급은 벌어 와야 돼. 네 월급 얼마야?’ 그때 당시 나하고 책정한 월급이 150만 원이었어요. ‘1년 뒤에는 반드시 150까지 벌어야 돼.’ 하지만 그 전까지는 투자기간이라고 생각해서 매월 10만 원밖에 못 벌어도 버텨야 하고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버틴 거죠.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에 150만 원을 벌어들였어요. 월급쟁이는 1년 뒤에 월급이 10만 원밖에 안 오르잖아요. 하지만 장사는 안 그래요. 2년 뒤, 3년 뒤 300, 500, 700… 이렇게 벌었거든요. 1만 5000원 벌던 곳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거지요.

정확하게 1년 된 뒤부터는 아침에 출근하면 대기 손님을 위해 의자를 늘어놔야 했어요. 손님들이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왔다고 해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 김을 구워 팔았죠.

그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에 ‘김의 달인’으로 출연하게 됐어요. 빨리 성공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생활의 달인’에 나가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TV 출연 전까지는 장사가 너무 안 돼서 파출부라도 하려고 YWCA를 찾아갔어요. 갔더니 하루 4만 원을 준다고 하기에 ‘저 좀 불러주세요.’ 말해두고 왔어요. 그 일은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아 못 갔지만, 그 일로 ‘박향희, 최하가 4만 원이다. 오늘부터 4만 원 못 벌면 집에 가지 마.’라고 생각을 하게 됐죠. 4만 원을 못 벌면 집에 안 가려고 결심을 했지만, 노점은 해가 지면 불이 없어 깜깜해지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초를 켜고 김을 구웠어요. 초를 켰더니 초가 금방 녹아 초 값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도 손전등도 많지만 나는 길도 모르고, 전통시장에는 불교사가 많아서 보이는 대로 천천히 녹는다는 뚱뚱한 초를 사다 불을 켜고 김을 구웠어요. 촛불에 의지해서 굽다 보니 촛불 아래는 안 보이고 위에만 환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감으로 김을 구웠어요. 하나, 둘, 숫자를 세고 뒤집은 다음 또 하나, 둘. 어떤 건 두께를 보고 하나, 둘, 셋 하고 뒤집고. 낮이 돼서야 김을 가지고 나가서 햇빛에 나가 익었나 안 익었나 비춰보면서 박자로 김을 구웠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제보를 해서 생활의 달인에서 전화가 왔어요. 처음에는 장난 전화인 줄 알았는데 진짜 생활의 달인이라고, 제보를 받고 연락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빨리 굽는 건 못한다, 오지 말라’ 했더니 그 사람이 ‘무슨 소리냐, 제보를 받았는데 무슨 겸손의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 제가 경기도까지 왔으니까 찾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도착해서 보더니, 고개를 막 갸우뚱거리면서, 제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어요. 오지 말라니까 와가지고는 빨리 못 굽는다고…. 이미 해가 어둑어둑한 때였는데 실망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을 보니 기분이 나빠졌어요. 저만큼 걸어가는 사람한테, 내가 팔던 김 세 봉을 담아서 뛰어갔어요. 김 3봉을 주면서 “아니, 여기까지 오지 말라니까 오셔서 그러세요. 어쨌든 저는요, 빨리는 구울 순 없어요. 익어야 뒤집죠. 그래도 이 세상에서 맛은 제일 자신 있어요. 드셔보세요.” 하고 제가 구운 김을 들려 보냈어요.

 

대통령 표창 수상

 

그때는 방학이라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있었을 때였어요. 어느 날 밤 11시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어요. 다짜고짜 “축하합니다, 어머니. 1차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하며 두 번째 시험을 쳐보자는 연락이었어요. 며칠 뒤 두 번째 시험을 보겠다고 시험 시간 30분 전에 전화가 왔어요. “지금부터 30분 뒤에 석교초등학교로 한 번 구운 김부터 8번 구운 김까지 각각 5장 가지고 오세요.”라고. 연습을 하려면 8장을 늘어놔야 하는데 매대가 좁아 김 8장을 늘어놓을 데가 없었어요. 30분 남겨놓고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마침 골목 끝 포장마차 같은 긴 노점 만둣집으로 뛰었어요. 얼마 전에 이사 온 그 집은 멀리서 마주치면 목례만 했지 말도 안 해본 사이였는데, 그 만둣집으로 냅다 뛰어가서 “죄송하지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라면서 남의 집 만두를 내려놨어요. 그 아주머니도 내가 너무 급해 보였는지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그리고 부랴부랴 연습을 했어요. 시험장으로 가는 시간도 남겨놔야 하니 한 20분도 못한 것 같아요.

그렇게 허둥지둥 시험장에 도착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들어올 때부터 “어서오세요, 어머니.” 하더니 신발 벗는 데부터 카메라를 들이대더라고요. “이리로 오세요.” 하면서 입구에서부터 학교 교실 안으로 끌고 가서는 조그만 의자를 하나 주고 안대를 씌우고, 나한테 조그만 칠판을 줬어요. 안대를 벗고 보니 제출한 김을 섞어놨더라고요. 그리고 몇 번 구운 건지 순서대로 적으라는 시험이었어요. 그런데, 보였어요. 내가 맨날 김을 몇 번 구운 건지 맞추려고 햇빛에다 들여다봤다고 했죠? 그 시험을 보던 교실 칠판이 하얀 칠판이었어요. 하얀 칠판에 까만 김을 대 보니까 내가 맨날 연습했던 상황과 똑같았어요. 흰 바탕색에 까만 김을 들고 들여다보니까 매일 햇빛에 나가서 봤던 것과 똑같아서 수월하게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됐는데, 한 번 구운 김부터 8번 구운 김까지 가져와 펀치로 구멍을 뚫어보래요. 원하는 부위를 아무 데나 뚫어서 뚫은 김의 맛을 보고 몇 번 구운 건지 맞히는 시험이었어요. 5개를 맞혀야 합격인데 8개 중 6개를 맞혔어요. 문제를 듣고 어디를 뜯어야 할지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떠오른 생각이 있었어요. 김을 굽다 보면 조금씩 타게 돼요. 그럼 이것 때문에 버리면 아까우니까 집게로 뜯어내 버리는데, 그조차도 아깝다는 생각에 입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그래서 쓴맛을 잘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탄 데만 잘라서 탄 맛이 쓴 정도를 가지고 늘어놓으니까 그게 정답이었어요. 여러 번 구울 때마다 쓴맛이 강해져요. 그래서 6개를 맞혔더니 박이 터지면서 “축하합니다!” 하면서 합격했다고 축하를 받았지요.

 

대통령 표창 수상

 

생활의 달인에 나왔다고 해도 처음 한 달만 바쁘고 그다음부터는 손님이 줄어요. ‘TV에 많이 나간다고 다 성공한 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달 정도만 손님이 TV 보고 왔다고 일부러 찾아오지만 점점 줄어드니, 어느 날은 생활의 달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을 하다 ‘달인 박향희의 구이구이 김’이라는 브랜드로 프랜차이즈 등록을 하기로 했어요.

손님이 너무 안 올 때, 하루에 1만 원 팔고 1만 5000원 팔았다고 했지요, 많이 팔아야 3만 원 팔았죠. 그때 당시 너무 손님이 안 오니까 성경을 한 장씩 읽었어요. 성경에 뭐라고 써 있냐면,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이렇게 써 있어요. ‘가든지’ 내가 못 가면 ‘보내든지’. 어느 날 갑자기 어? 이것 봐라, ‘손님이 오든지 안 오면 내가 가든지’라는 거네? 이 생각이 든 거죠. 손님이 안 온다면, ‘그래 오지 마, 내가 갈게.’ 이 생각이 들면서, 내 자리가 손님은 안 오는 자리지만 도매하기엔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장 안에는 차가 못 들어가지만, 당시 제 매장은 너무 나쁜 위치, 시장 가장자리에 있었기에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도시든 이 도시가 형성됐을 때 시장은 그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거든요. 그래서 도매하기엔 적지인 거예요. 시장 전체는 도시의 중앙이지만, 그 가장자리인 제 매장은 차도 들어올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요. 오토바이 타고 와서 물건 떼 가기엔 너무 좋은 거죠. 그때부터 저는 신호등 사거리 끝내주는 위치에 있는 붕어빵장사들, 겨울만 장사를 하고 포장마차를 닫아두는 붕어빵장사한테 김을 갖다 줘봤어요. 소금하고 기름을 바른 걸 주고 직접 구우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장사가 무척 잘 되는 거예요.

오픈하면 50만 원 파는 사람도 있고 80만 원, 90만 원 파는 사람도 있었어요. 부평동사거리, 금천동사거리… 무지하게 장사가 잘 됐죠. 나보다 더 잘 돼서 집도 두 채씩 사고 그랬어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Q. 위기는 없었나요?

A. 수입이 늘고 정식으로 공장을 세워 제조업을 시작했을 때였어요. 정식으로 제조업을 시작하면서 그때서부터 모아둔 돈을 다 까먹었어요. 제조업 정말 힘들어요. 세금을 내고 싶어도 세금 내는 방법을 모르고, 얼마나 어려운지 사기 치고 싶지 않아도 노동법은 바뀌고 월급 주고 싶어도 바뀌어서 어렵고요, 직원도 있어야 하니까 이 공장이 기본적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경비가 너무 많은 거죠. 그러다보니 벌어둔 돈을 다 까먹고도 돈이 모자랐어요. 나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럼 나는 정정당당하게 세금 내는 사람들끼리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데는 큰 곳끼리, 큰놈끼리 하자. 내가 정식 프랜차이즈이기 때문에 작은 곳과 일을 하니까 안 맞는 거였죠. 회사도 번듯하게 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세금 거래를 해야 안 힘든 상황이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대형마트를 노크해봤더니 쉽게 나를 만나주지 않았어요. 만나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 도시락을 싸 가지고 찾아갔어요. 그래서 우리를 받아주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마트에는 조리코너가 아니면 후드를 내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연기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결국 대형마트에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매출이 크게 증가하게 됐죠. 대형마트에는 대기업이 아니면 각종 마트에 입점하기 어려운 편인데, 저희는 이마트, 롯데마트, 농협 하나로마트에 입점해 있어요.

Q. 연기를 없애면서 김을 굽는 기계를 만들어 특허를 취득하셨죠?

A. 제가 크게 돈을 벌 수 있었던 계기기도 하죠. 연기가 자동으로 밑에서 없어지는 구이 기계 특허를 냈어요.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지긋지긋한 연기 때문에 한이 되니까 직접 개발을 하게 되더라고요. 마트에서도 연기 때문에 입점을 못 할 상황이 되니 이 연기를 없앨 방법을 찾았어요. 고온에 김을 구울 때는 연기가 펄펄 날 수밖에 없는데 외부 후드 없이 연기가 사라지는 기계를 개발했어요. 이 기계를 개발해서 대박이 난 거예요. 연기 관련 특허를 유사특허까지 3개를 가지고 있어서 경쟁력이 있어요. 중소기업이었던 규모가 갑자기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연기를 없애주는 개발특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원래 식품공장에서 기계까지 특허를 내는 곳은 별로 없지만 저는 기계 특허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후드가 없는 구이 기계는 아무 데나 갖다 놔도 연기에 구애받지 않고 영업을 할 수 있어요. 그 지긋지긋한 연기, 연기 때문에 매일 아침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구박을 받았던 기억이 오히려 저한테는 전화위복이 된 거죠.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Q. 지금까지의 사업을 되돌아본다면?

A. 2002년에 노점을 해서 1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다가 2003년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서 2005년, 6년, 7년에는 돈을 많이 벌었죠. 2008년부터는 제조업을 시작했다가 ‘박살’이 났던 시기도 있었지만, 2011년에 연기를 제거하는 기계를 개발해 매출이 3배 뛰었어요, 2011년까지는 고생했지만 특허를 계기로 22억 매출이 66억이 됐죠. 그런데 매출이 50억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직원도 늘어나고, 그때서부터 내가 기업 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직을 관리하기에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었고, 세상 똑똑하다는 사람 다 데려다 놔도 원활하게 돌아가주지 않았어요. 사장이 업무에 무지하니까 아무리 똑똑한 사람을 구해다 놔도 제대로 운영이 될 수가 없었죠. 그때서부터는 과외공부, 조직관리 공부에 몰두했어요. 서울 가서 조직 관리 공부에 프랜차이즈 본사 매뉴얼 공부에…. 공부에만 1억 넘게 투자했어요. 3년 전 계산으로 1억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한 2억은 썼다고 볼 수 있겠네요. 부족함을 느껴 계속 공부했죠. 한편으로는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선생님 만나 컨설팅을 받고, 또 한편으론 서울에 공부하러 다니면서 시스템 잡아가고. 다른 사람에 비해 일하랴, 공부하랴, 연구개발까지 하면서 몇 배의 힘이 들었죠.

 

제1공장
제2공장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프랜차이즈 사업과 들기름을 듬뿍 넣은 전통 김 유통을 더 활발히 하려고 해요. 우리나라의 김은 수출을 많이 하고 있어서 이미 대한민국 김의 위상이 떠들썩하잖아요. 그렇지만 전통성은 점점 잃어버리고 있어요. 우리나라 김은 들기름을 아주 많이 발라 엄마가 직접 솥뚜껑이나 화덕에다 구워줬던 직화구이가 기본이었어요. 그런 김을 만들어서 수출을 할 생각으로 도전해 아마존에서 신규 제품 1위에 올랐어요. ‘마스터 희’라는 브랜드로 미국 아마존에서 반응이 무척 좋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한국의 김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해요. 김은 값싼 반찬이 아니고 고급스럽고 귀한 거였어요. 그 귀하고 맛있던 김이 천대받게 된 것은 김을 대량생산하게 되면서부터였어요. 들기름을 바르면 열흘도 못 가기 때문에 대신 식용유를 넣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맛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원래 우리 전통 김은 들기름을 넣어서 구워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 들기름은 열흘 만에도 절어요. 어떨 때는 일주일도 못 갈 수 있어요. 그래서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면서 “어머니, 집에 가서 냉동실에 넣으세요.”라고 안내하도록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우리 김은 들기름으로 구워 오메가3 함유가 높아요. 식품 중 들기름에 오메가3가 굉장히 많이 함유돼 있는데, 들기름을 듬뿍 사용해 구웠더니 저희 ‘네모난 밥 김’ 한 봉에 오메가3 하루 권장량(500~2,000mg)이 들어있어요. 그러니 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하루에 저희 김 한 봉 먹으면 될 정도라고 할 수 있죠. GS홈쇼핑에 입점할 때 들기름을 많이 넣어서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검사를 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네모난 밥 김’ 한 봉에 무려 오메가3 1,000mg이 함유돼 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쇼호스트가 다 우리 집 단골이래요. PD도 마찬가지고요.

또 김의 감칠맛을 좌우하는 소금은 800℃ 고온에서 끓여 불순물을 없앤 순수 소금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 외 화학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 대신 새우, 표고버섯 등 천연 조미료만 사용해 맛과 풍미를 높였습니다. 또한 국내산 최고급 김 사용과 이물질 엑스레이 투시기를 활용해 식품안전경영시스템(FSSC22000)인증을 받는 등 위생적인 생산설비를 갖춰 소비자들이 믿고 먹을 수 있는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어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한백식품에는 ‘세계로 가는 다리’가 있다.

현재 한백식품은 미국,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프랑스, 홍콩, 싱가폴, 몽골 등 세계 1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 진출한 김과 김 스낵은 신규 상품 중 판매 1위를 기록하는 등 외국인 입맛을 홀리고 있다. 김 스낵은 제품 특성상 땅콩, 호두, 해바라기씨 등 기능성 원료가 포함돼 상하기 쉽기 때문에 포장 시 산소함량을 최소화해야 한다. 박 대표는 제품의 산패를 막기 위해 지난해 5월 ‘김자반 산패방지기술’ 특허를 출원했다.

앞으로 한백식품 목표는 수제 김 생산량 증대다. 스마트공장 도입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생산을 꾀하고 있다. 쉼 없이 발전하는 박 대표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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