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정기서려 많은 영웅 낳아
무등산은 높고 커 웅장하다. 웅장했기에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신이 무등산에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무등산을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숭배하여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또한 광주 사람들은 일찍부터 무등산에 올라가 개인의 안녕과 국가의 무사를 빌었다. 아예 관아에서는 무등산에 신사(神祠)라는 제단을 설치하고 무등산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무등산신은 영험했다. 외적을 물리치고, 비를 오게 하고, 질병을 물리쳐달라고 기원하면 효험을 냈다. 전라감사도 일부러 무등산에 와서 기원했다. 신사 대신 천제단(天祭壇)을 세워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무등산을 영산(靈山)이라고 했다. 조선 사림의 종장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무등산을 영궁(靈宮)으로 비유했다. 무등산을 신선이 사는 선산(仙山)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무등산은 신령스러웠다. 신령스러움은 태몽에 나타났다. 무등산이 입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정륜은 정충신을 낳았다. 정충신은 미천한 신분임에도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무등산이 영웅을 낳게 한 것이다.
무등산은 신령스러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발(李潑)의 어린 아들이 기축옥사의 화를 피해 숨은 곳이 무등산이었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들어간 항일의병,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들어간 광주학생운동 지도부, 신군부의 검거령을 피해 들어간 5·18 관련자 등도 있었다. 무등산은 영산이어서 사람을 지켜주었다.

사람을 낳고 지켜주는 무등산은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알고 있다. 무등산은 인간사를 다 알고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5·18의 참화를 겪고 그것도 의거나 항쟁이 아닌 폭도에 의한 사태로 오도되고 있을 때에, 누가 동족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했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을 때에 광주 사람들은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주 사람들은 5·18의 진실 규명과 민주주의 정착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늘같이 높고 큰 봉우리가 웅장하게 백여 리에 걸쳐 있어 무등산 정상에 오르면 수백 리 산천이 보인다. 이런 산세 때문에 광주에서 걸출한 인물이 대거 배출되었다.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풍토와 기후가 시원스럽고 넓어 경치가 좋은 마을이 많고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고 광주를 평가했다.
광주는 자타가 공인하듯이,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광주를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 평가한 단서는 무등산에 있었다. 무등산과 인물을 연결시킨 묘사는 영광 출신 강항(姜沆:1567~1618)이 지은 [광주향교 상량문]에 나와 있다. 여기서 강항은 학문으로 이름을 높인 고봉 기대승이나 눌재 박상, 많은 충신효자나 명경거공이 광주에서 배출된 것은 무등산 산신(山神)과 지령(地靈)의 보살핌 덕택이라고 말했다. 16세기의 선비인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정충신을 애도하는 시에서 "서석산의 수려한 기운 한 곳에 모여(瑞石鍾靈秀) / 출중한 영재가 세상에 나왔어라(英才出等夷)"라고 읊었다. 장흥 출신 실학자 위백규(魏伯珪:1727~1798)는 무등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에서 신령스런 수많은 골짜기에 신의 조화와 천년의 정기가 서려 있어 많은 영웅을 낳았다고 했다.
이런 유형의 해석은 옛 기록에 수없이 발견된다. 다산 정약용은 10대 후반에 화순현감에 재임 중인 아버지를 뵙기 위해 오가다 광주를 들렸다. 그때 광주 관련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그 가운데 [다시 광주를 지나며]라는 시에서 정약용은 광주를 상징하는 무등산이 배출한 인물로 정충신을 꼽았고, 당시 광주 사람들은 정충신을 입에 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명산 무등산이 정충신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길러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가 정충신을 거론한 까닭은 무등산이 인물을 배출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광주 출신 이연관(李淵觀:1857~1935)의 진단을 보자. 그는 무등산의 아름다움을 읊은 후, "산수가 이처럼 맑고 맑은데 어찌하여 생김새나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없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지 장군과 충장공 김덕령의 용력, 제봉 고경명과 금남 정충신의 곧은 충정은 모두 무등산의 원기가 뭉쳐 생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광주는 무등산의 정기를 받아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 용력과 충정을 지닌 호국인물이 많았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무등산을 호국백으로 봉작했듯이 말이다. 당연히 이들과 관련된 스토리가 무등산에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말년에 무등산 지봉인 장원봉 아래에 은거한 정지, 사림정치의 쇠락을 목도하고 무등산 자락 소쇄원에 은거한 양산보, 실세와 낙향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무등산을 오른 고경명, 주검동에서 칼을 주조하여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무등산을 삼킨 태몽으로 태어난 정충신 등이 그것이다.
높이가 높은 만큼 맑고 시원한 물줄기가 여기저기에 골짜기를 만들었다. 기암괴석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무등산은 일도의 명산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외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유람하고 쉬는 터전이었다. 멀리는 방랑시인 매월당 김시습, 사림의 종장 김종직, 민생정치의 선구자 토정 이지함 등이 그리고 가까이는 육당 최남선, 노산 이은상 등이 멀리서 무등산을 찾아와 유려한 문장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무등산은 약초캐고 나무하고 화전을 일구는 서민과 백성들의 일상의 일터이자 안식처였다. 또 많은 예술가들이 무등산 자락에 창작의 터를 잡았다. 최근에는 산장으로 여행 온 신혼부부, 허리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원효계곡 물통골로 물 맞으러 온 어르신들도 무등산을 찾았다.
수일 전에는 유력 대선 후보들이 앞 다퉈 무등산을 찾았다. 무등산에는 용이 살고 있는가 보다. 누가 그 용을 잡을 것인지 결과가 주목된다.
글쓴이 김덕진(광주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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