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石은 높은 산이 아니라 하늘이다”

1975년 그 시비제막식에서 나는 축시를 낭독하였는데 그 축시 속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무등산’이라고 썼다. 나는 무등산과 시인 김립을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뒤에 ‘무등산 규봉’이라 제한 시에서 나는 ‘무등산도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 적었다. 나의 감정하고는 달리 김립이 쓴 시 무등산은 ‘무등산고송하재 적벽강심사상류’(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砂上流)라하여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위에 흐른다.’로 읊었다.
무등산에 대한 나의 감정은 지금도 심상치 않다. 서정주의 명시 ‘무등을 보며’에 화답하면서 쓴 시 ‘무등을 바라보며’는 무등을 바라보며/ 꿈과 하늘을 꽃처럼 피운/ 정말로 큰 사람을 바라보며/ 서석에서 강기슭까지/ 오로지 푸른빛으로 흐르는 이름을 생각하며로 시작된다. 그 시 3연에는 무등을 바라보며/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키 크고 가슴이 넓은 사람을 사랑하며/ 눈이 내릴 때 비가 올 때 할 것 없이/ 가슴 벅차게 올린 북소리를 그리워하며라 외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뒤에 쓴 ‘무등산’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시에서 나는 ‘환호하는 어린이를 위하여 미소로 답하는 거인같이 도시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은 춘하추동 한결같이 그렇게 있다’라 썼다. 무등산에 관하는 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시도 있다. ‘진달래꽃이/ 새인봉 절벽을 놀듯/ 무등산 산새가 /약사암 목탁을 놀듯/ 광화문 촛불이 /단군 할아버지를 놀듯/ 디오니소스의 거시기가 /나의 광기를 놀고 있다.’
무등산에 대한 과장은 나뿐만이 아니다. 선인들의 글에서도 많이 읽을 수 있다. 가령 조선사림의 종장 김종직(1431~ 1492)의 시에 蒼蒼瑞石聳秋空/ 十日尋常在眼中/ 喜慶樓前更回首/ 雲煙葯强見靈宮 (창창서석용추공/ 십일심상재안중/ 희경루전경회수/ 운연재하견영궁) 즉 ‘푸르고 푸른 서석산 가을 하늘에 솟아 있는데/ 언제나 십일은 눈에서 사라지지 않네/ 희경루 앞에서 다시 돌아 보메/ 구름 연기 잠깐 걷히자 영공이 보이는구나’ 라 하였고 고흥출신 선비 정운희(1566~1635)의 시 遊瑞石山 (유서석산)에는 無等山如帝者尊/ 衆峰環拱盡趨奔 (무등산여제자존/ 중봉환공진추분) ‘무등산은 황제와 같이 높고/ 뭇 산이나 봉우리가 둘러 맞잡고 뒤따르네.’라 했다. 장흥 출신 위백규(1727~1798)는 서석산을 유람하며 라는 시에서 ‘萬壑靈觀皆造化/ 千年正氣幾英雄'(만학영관개조화 천년정기기영웅) 풀이하면 ‘수많은 골짜기 신령스런 모습은 다 신의 조화이니/ 천년의 정기가 많은 영웅을 낳았구나.’라 하였다.
19세기 선비 이유원(1814~1888)은 ‘만약 미전 (송나라 화가)이 본다면 무등산의 바위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도포와 홀을 가져오게 하여 절을 할 것’이라 하였다. 송병선(1836~ 1905)는 瑞石山記(서석산기)에서 ‘어쩌면 신의 기술과 귀신의 솜씨로 바람과 천둥을 불러 이렇듯 기이한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인가’ 하고 감탄하였다. 최남선(1890~1957)도 尋春巡禮(심춘순례)에서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진실하고 거짓 없이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서석이다’라고 경탄하였다. 노산 이은상 (1903~1982)도 무등산 기행에서 “금강산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 하고 서석산을 육지의 해금강이라고 한다면 아주 유명한 해금강을 본 사람은 짐작할 것이다”고 말하고 또한 김윤덕(1857~1936)은 서석유람기에서 ‘서석은 이렇게 높아 산이 아니라 하늘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고금의 시인들이 무등산에 흥분한 까닭은 너무나도 정직한 감정인 것이다.
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砂上流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위에 흐른다.’
- 김삿갓 -
글쓴이 범대순(시인,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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