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최초의 상설 영화관은 광남관
광주최초의 상설 영화관은 광남관
  • 한국시민기자협회
  • 승인 2015.06.0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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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극장
박래품(舶來品) 영화의 등장은 제국과 식민 경험 그리고 도시 발달의 삼위일체로 이뤄졌다. 영화 상영은 극장이라는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광주의 극장 역사는 일제강점기 1910년대 중후반 광주좌(光州座)로부터 시작되었다. 광주좌의 존재는 1917년에 출판된 『광주지방사정』에서 ‘근년에 신축되었다’는 기록에서 발견된다. 1919년 8월 4일과 1920년 5월 12일 매일신보 역시 ‘독자위안회’ 명목으로 광주좌에서 예기(藝妓)들의 기예를 관람하게 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어 광주좌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매일신보가 광주좌를 ‘연극장’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광주좌는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관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의 최초 상설영화관은 광남관(光南館)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1910 식민지시대의 영화검열 1934』(2009)에 1927년 10월 1일 현재 광남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남관의 경영자는 구로세(黑豊瀨)였으며 관객 정원 543명에 일본 닛카츠(日活) 계통의 영화를 상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외일보 역시 1930년 4월 2일자 기사를 통해 “광주학생사건운동으로 다사다난한 광주시민대중을 위로코저” 광남관에서 “광주시민위안영화대회”를 개최한다고 적고 있다.

위와 같은 식민 지배자의 기록과 언론사의 공식 문헌에 근거하면 광주의 극장 역사는 19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1926년에 태어나 광주에서 한 평생을 보낸 향토사가(鄕土史家) 박선홍이 쓴 『광주 1백년』(1994) 2권에 따르면, 광주좌의 개관 시기는 위의 문헌 기록과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광주좌는 1925년 개관하였으며 광남관은 1931년 12월 세워진 가설극장이라고 한다. 또한 광주좌는 현재 충장로 파레스 호텔 자리에 들어섰고, 광주좌가 화재로 불타자 광주좌 주인 후지가와가 곧바로 광남관을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최초 극장의 개관 연도라기보다 이들 극장 등장으로 인한 식민지하 도시 광주의 변화가 될 것이다. 즉, 극장은 기계 매체 영화가 전시하는 근대 문물을 조선인에게 소개하는 교육장이 되었으며, 사각의 닫힌 공간 극장은 ‘판’이라는 근대 이전과 다른 형식의 놀이 문화를 제시한 매개체가 되었다. 게다가 극장은 불온(不穩)의 공간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근대화의 외부적 존재인 유곽(遊廓)의 등장에 의해 강화되었다. 광주에 처음으로 소개된 근대 극장 광주좌가 위치한 황금동은 불로동과 함께 일본인 이주자들의 정착과 함께 일본식 여관과 요리집 그리고 일본인 기녀(妓女) 게이샤(藝者)가 첫 선을 보인 곳이기 때문이다.

무등극장, 광주극장 일제강점기에 개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극장 가운데 현존하는 곳은 현 무등시네마의 기원인 제국관(帝國館)과 광주극장(光州劇場)이다. 제국관은 경찰서와 법원 등 식민 행정기관이 몰려있던 일본인의 거리 충장로 1가에 자리를 잡았다. 박선홍은 제국관 개관 시기를 1932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930년 3월 30일자 중외일보 기사를 통해 1930년에 이미 제국관이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국관은 구로세 도요다(黑瀨豊藏)가 세운 극장으로, 건물의 상하층과 장외를 포함해 관람객을 총 7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1930년 3월 26일 <아리랑>(나운규, 1926) 후편이 제국관에서 상영되는 도중 이웃집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사실 화재로 오인한 군중이 극장 밖으로 뛰쳐나간 사건이 보도되면서 제국관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최대 흥행작 <아리랑>이 일본인 거리의 일본인 소유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그때까지 조선인이 설립한 극장의 부재를 의미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락 제공은 물론 식민지 조선인의 공론(公論)을 결집시키는 기능까지 수행한 조선인 극장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충장로 5가에 문을 연 광주극장이다.
1933년 설립 신고를 하고,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하던 날 개관한 광주극장은 1,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극장이었다. 제국관이 최대 700여명을 수용한 것에 비한다면 광주극장의 크기는 가히 놀랄만한 것으로, 당시 광주부민(府民) 40명 가운데 1명을 입장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 광주극장
광주극장 설립자는 선대(先代)부터 대지주 집안 출신인 최선진(崔喜鎭)으로, 그는 여객운송과 대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하여 광주극장 창립 당시 총 6,000개의 주식 가운데 4,730개를 소유하면서 주식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최선진은 광주극장 개관 이전인 1919년 사립광주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활동했는데, 그가 설립한 유은학원은 광주시민에게 ‘광주상고’(현재 광주동성고등학교)로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광주극장은 일본 쇼지꾸(松竹) 영화사와 닛까스(日活) 영화사 작품을 상영하기도 했지만, 광주극장이 조선인 중심의 거리에 들어섰기에 조선인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 충장로 4가와 5가는 조선인들의 생활필수품인 포목, 고무신, 미곡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극장은 영화 상영 이외에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악극을 무대에 올렸다.
무엇보다도, 광주극장은 식민 질서 아래 공적 공간으로부터 배제된 조선인을 집합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즉, 1936년 6월 10일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전개하는 가운데 조직된 대동사(大同社) 전남연합회(全南聯合會) 창립대회가 광주극장에서 열렸던 것이다. 가축 도살과 제혁(製革) 그리고 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하여 근대 이전 천민 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의 신분 질서 타파를 외치는 목소리가 공론화되면서 광주극장은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식민지 조선의 욕망의 집합소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해방이후 적산(敵産) 처리된 제국관은 동 극장에서 오랫동안 지배인으로 일한 전기섭이 불하를 받게 된다. 전기섭은 미군정 광주 기관에 재직 중인 영어 통역관의 친형을 극장 전무로 영입하였기에 극장을 인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해방이후 제국관은 잠깐 동안 공화극장이 되었다가 1970년대까지 동방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70년대 주인도 바뀌고 극장 이름도 바뀌면서 무등극장을 거쳐 현재 멀티플렉스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개관 이래 현재까지 단관(單館) 극장인 광주극장은 1968년 1월 18일 화재가 발생하여 안타깝게도 1930년대 지어진 건물이 전소되는 사건을 경험했다. 하지만 광주극장은 8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원래 건물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어 현재와 같이 건재하고 있다. 2002년 예술영화전용관으로 변한 광주극장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일반 상업극장에서 찾을 수 없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등을 상영하면서 광주광역시 영상 문화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중흥과 도시 발달 그리고 극장
해방을 동반한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정치적 격동의 시간이 잦아들고 반공의 국민국가가 강화되면서 한국영화 산업은 중흥을 맞이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 제작 진흥 관련법이 제정되고 <춘향전>(이규환, 1955)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영화 작품수와 극장 숫자가 늘어났다. 당대 새로이 개관한 극장은 동구(東區) 금남로와 호남동 그리고 동명동 등 광주시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신영극장(이후 대한극장), 남도극장, 태평극장, 천일극장, 계림극장과 중앙극장이 그들이다.
1960년대 들어 도시 확장과 인구 유입 증가 그리고 도시 공간의 세분화가 진행되면서 동구에 이어 북구에도 새로운 극장이 문을 열었다. 동구에 제일극장과 현대극장, 시민관과 한일극장 그리고 동아극장이 있었다면, 북구에 문화극장과 아세아극장 그리고 동양극장이 이름을 알렸다. 전통 도시가 물길을 따라 생겨나고 시장이 형성된 것처럼, 광주천변을 따라 태평극장과 남도극장 그리고 천일극장이 개관을 했고, 광주시 최대 규모 양동시장 덕을 보면서 한일극장과 현대극장 그리고 아세아극장이 들어섰다.
이들 극장 가운데 현대극장은 당시 광주와 호남의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전남 광산군 송정읍(현재 광주광역시로 편입)으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지리적 수혜를 입은 극장이 었다. 광주대교에서 현재 동부소방서(당시 ‘광주역사’)까지 이어지는 대략 250미터 거리에 광주와 전남북 지역을 아우르는 각종 여객회사들 - 장흥여객, 함평여객, 금성여객, 중앙여객, 천일버스, 그리고 인근 금남로의 전남여객, 광주여객, 동방여객 등 - 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동구 대인동에 ‘광주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여객회사들이 그곳으로 집결하기 이전까지 현대극장 주변은 충장로에 버금가는 숫자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장의 존재로 인해 덕을 본 극장은 양동시장 다음 규모인 대인시장을 지척에 둔 시민관과 계림시장 입구의 계림극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행정 구역이 확장되고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광주는 지역 거점 도시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도시 공간의 성격은 세분화되었고 극장 역시 그들이 자리한 장소에 따라 각각의 색깔을 만들어갔다. 1959년에 이미 광주시 전체 인구는 30만을 넘어섰고, 1960년대 중반 이후 3차 산업 종사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동구 충장로를 중심으로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소비재 산업도시의 면모를 갖추면서 광주라는 도시는 점점 화려해져갔고, 그것에 부응이라도 하듯 극장의 볼거리도 다양해졌다.


▲ 성도극장
1963년 제일극장이 70mm 영사기를 설치하여 대형 화면과 입체 음향을 선보이면서 극장에 가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도시의 변화는 충장로에 국한되지 않았다. 북구 서방사거리의 동양극장은 광주의 동북부와 전남북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했고, 북구 대단위 공장인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인근 일신방직 사택 건너편에 문화극장이 1965년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를 관람 대상으로 삼은 여타 극장과 달리, 문화극장은 생산직 회사 사원들의 ‘문화생활 증진’이라는 취지를 내세운 특정 관객 대상 극장이었다.
하지만 극장이 일상의 탈출구로서 마냥 즐거웠던 공간은 아니었다. 권력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영화 제작과 서슬 퍼런 정치 독재로 인해 관객은 동원과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아버지(國父)’ 이승만을 찬양하기 위한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신상옥, 1959)이 서울에서 제작되는 동안, 광주에서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1959)이 만들어졌다.
1950년대 후반 반공의 민족 국가를 표방한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해 광주의 중고등학교 학생과 시민이 동원되었고, 1960년대 들어 늘어난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의무적으로 관람해야 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관객은 기립한 상태로 있어야 했고, 그 다음 이어지는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는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의 모습을 극장 가득 채웠다. 그렇게 ‘국민되기’를 다짐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야 ‘본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다.

멀티플렉스(multiplex)와 ‘4D’ 영화 시대 극장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광주 지역 극장 역사는 또 다른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이념에 충실한 영화만이 제작되고 검열이 강화되면서 그리고 TV가 등장하면서 영화 산업은 위축되고 관객 수도 줄어들었다. 또한 1980년대 공연법 변화로 인해 수많은 소극장이 등장했다. 대인동에 등장한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개관한 소극장은 충장로의 성도극장을 필두로, 1984년 한 해 동안 무려 15개가 개관을 했다. 1980년대 전체 시기 동안 무려 27개의 소극장이 명멸하는 동안 관객은 극장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을 한 해 앞둔 1999년, 서울 강변 CGV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광주 역시 1999년 9월 16일 7개의 스크린을 보유한 충장로 5가의 ‘엔터시네마’가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이름을 알렸다. 엔터시네마는 영화 상영이라는 본래 용도 외에 관객에게 외식과 주차 문제 해결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골라 보는’ 선택 대상이 되었고 관객은 ‘보다 질 좋은’ 서비스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단관 극장이 휴업 또는 폐업을 하기 시작했고, 대신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무등극장 역시 멀티플렉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기에, 일제강점기 등장 이래 현재까지 단관 극장의 위엄(威嚴)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광주극장이 유일하다.
사람들은 이제 멀티플렉스에서의 영화 관람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보는 것을 넘어 ‘타며 느끼는’ 촉각의 경험까지 제공하는 4D 영화가 극장에 등장했다. 가속화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타는(ride)’ 영화의 시대, 단관 극장 건물은 사라지고 그곳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진다. 두려운 것은 단관 극장의 소멸과 함께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그곳에서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기원을 발굴하고 기억을 보존하며,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단관 극장이 존재했던 동구 지역이 현재 노인층 인구가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라져가는 단관 극장 가운데 하나쯤 노인 관객을 위한 상설영화관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서울 서대문의 옛 화양극장이 노인층을 위한 청춘극장으로 거듭나듯이 말이다. 그것은 ‘기억의 영원한 방부제’로서 영화가 아니라, 지금-여기 ‘청춘’의 힘으로 살아있는 영화를 담아내기 위한 극장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위경혜(영상예술학박사, 전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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