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불재 샘골에서 발원 24.2km 흘러 극락강과 합류

광주천의 다리들은 디자인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길이도 짤막하고, 그 간격도 일정하지 않다. 그 당시 다리의 모양이나 형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리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교통수단의 통로로만 인식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천의 다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숨결,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간의 기록 때문이다. 광주천은 동구 지원동 무등산 장불재 샘골 계곡에서 발원하여 학동, 금동, 임동, 유덕동에 이르는 총연장 24.2km를 흘러 극락강과 합류한다.
광주천은 광주 도심에서 유일한 수변녹지축이자, 양호한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 광주시민의 자연자산으로 친수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천은 또 1960년대 말까지 광주시민의 생활 터전으로 빨래터, 농공업용수, 체육공원, 자연학습공간으로 이용됐다. 특히 천변 공터는 위락공간으로 난장, 천막공연, 보름달 다리밟기와 쥐불놀이가 성행했다. 광주천에 다리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엽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 광주 중심부는 광주천의 오른쪽 강둑을 따라 형성됐다. 현재의 금남로를 축으로 전남도청과 각종 공공시설물이 들어서고 동명동 일대에 주택가가 형성됐다. 이 때문에 광주천을 건너다닐 일이 많지 않았고, 그 만큼 교량의 중요성도 크지 않았다. 19세기 말엽까지 광주천에 놓인 교량은 현재 부동교 부근에 있었던 작은 장터와 사동을 잇는 흙다리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겨우 사람이나 지나다닐 정도여서 교량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1917년 ‘공원다리’생겨 역사상 광주천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다리는 ‘노지다리’로 알려져 있다. 1896년 광주를 방문했던 오횡묵이란 사람이 남긴 기록 ‘지도총쇄록’에 운교, 즉 구름다리라고 소개했던 다리이다. 여기서 ‘노지’는 광주를 부르던 옛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노지다리는 통나무를 베어다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얼기설기 잔가지를 얹은 다음에 흙을 덮어 만든 다리였다.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솟아올라 마치 굽은 새우등처럼 보였고, 조금이라도 거센 물살을 만나면 쉽게 무너져 내리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 이후 통행량과 물동량이 늘면서 1907년께 처음으로 반영구적인 다리 광주교 (일명 공원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차량 등 현대적 교통수단의 통행을 생각해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최초의 광주천 교량이었다.
광주교는 광주-목포 간(현 국도1호선의 모태)도로를 개설, 확장하는 과정 중에 가설됐다. 이 다리는 목포를 거쳐 영산포를 통해 광주로 들어오는 통로로 일본인들에게는 광주 입성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 나무다리로 놓였던 광주교는 1935년 차량통행이 늘어나고 읍에서 부(현재의 시)로 승격을 앞두고 반영구적인 철근콘크리트로 바뀌었다. 이어 광주교가 목교였던 1927년 무렵에 광주대교가 세워졌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광주대교는 백운동, 월산동 방면에서 충장로 3~4가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요긴했다. 광주교(공원다리)와 인접하고 있어 일제시기부터 신광주교, 또는 대교라고 불렀다.

광주공원 아래 광주교 일대는 장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높은 신사에서 천변 아래에 있는 조선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일본인들은 또 조선시대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예를 갖추던 사직공원 일대에 벚꽃을 심고 조그만 동물원을 만들었다. 사직공원은 1920년대 중반 일본 왕세자의 결혼기념을 위해 조성됐다.
일본인들이 사직공원을 왕래하다보니 다리가 필요했고, 이렇게 가설된 교량이 바로 금교였다. 녹십자병원 앞 부동교는 1920년대 조선인들이 사동시장을 가기 위해 건너던 다리였다. 부동교는 조선인 전용 다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동교는 광주 3.1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광주천이 곧 의병들의 처형장이어서 시민들의 울분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동교 부근에 5일장
만세운동의 현장인 작은 장터가 바로 부동교 밑 광주천 둔치였다. 큰 장은 지금의 현대극장 앞 수기동 일대로 음력 2일과 7일에 열렸다. 작은 장은 녹십자 병원과 부동교 일대에서 음력 4일과 9일에 마련됐다. 이들 시장은 1920년대 광주천의 직강공사로 사라지고 말았다. 직강공사를 통해 광주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일제는 이 두 장터를 합쳐 광주공원 아래에 사정(社町)시장을 개설했다.
발산교 뽕뽕다리는 1960년대 가설

광주천의 다리들은 2000년대 들어 모양새가 바뀌었다. 개선된 다리는 남광교, 학강교, 양림교, 금교, 서석교 등이며, 이에 앞서 광주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롭게 가설했다. 남광교는 <흩날리는 생명의 빛>, 학강교는 <학의 날갯짓으로 환하게 피어오르는 자연의 빛>, 양림교는 <고싸움으로 화합과 풍년, 평안을 기원하는 솟구치는 빛>, 금교는 <광주의 옛 이름 금계인 비단의 물결>, 서석교는 <새로운 광주천으로 초대하는 관문(광주읍성)의 빛>을 형상화했다.
다리는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것만큼 다리에 깃든 사연도 많다. 그 다양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옛 광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광주천의 다리는 증심사 입구 증심교에서부터 춘설헌으로 건너는 작은 다리를 거쳐 운림교-홍림교-중심천교-원지교-방림교-학강교-양림교-금교-서석교-부동교-중앙대교-광주교-천교-태평교-양유교-양동교-발산교-광천1교-광천철교-광운교-광천2교-광암교-동림교-유촌교-무진교-상무교-극락교-벽진교 등으로 되어 있다.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뉴스포털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