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역사문화연구소, 정읍 '영주정사'...담양 '영학숙' 학술대회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정읍 '영주정사'...담양 '영학숙' 학술대회
  • 최행영 기자회원
  • 승인 2021.08.23 1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남지역 인재 양성 산실...걸출한 인물 배출

구한말 호남인재의 산실이자 민족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영주정사(정읍 흑암동)와 영학숙(담양 창평)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최근 정읍시 초산동 YMCA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렸다.

정읍시(시장 유진섭)가 주최하고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이사장 김재영)가 주관한 학술대회에는 내빈들과 1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한국근대사에서 '영주정사'와 '영학숙'의 위상 및 역할에 대한 이번 학술발표에는 김재영 이사장을 비롯해 이진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학술분과위원장), 권수용(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원), 김상욱(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정원기(전북역사교육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이 패널로 참여했다.

이들의 주요 발표를 종합하면, 영주정사(瀛州精舍)는 창암 박만환(1849-1926) 선생이 1903년 정읍시 흑암동 두승산 동쪽에 설립한 기숙학원이다. 또, 영학숙(英學塾)은 춘강 고정주(1863-1933) 선생이 1906년 담양군 창평면 월봉산 상월정에 세운 기숙학당이다. 

정읍시 흑암동(현 농소동) 출신인 박만환은 청소년 시절 충남 아산의 대유학자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간재(艮齋) 전우 등과 동문수학했다.

그 후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거쳐, 1886년 의금부도사, 1890년 삼례도찰방에 임명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와 성리학(인간성규명,인의충신선행)의 도리를 지키고 향촌교화 활동을 하고자 1903년 영주정사를 설립했다.

기본적으로 영주정사(등록문화재 제212호)에는 유교의 기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논어,맹자,대학,중용과 관련된 서적을 두었고, 강학을 위한 공간에는 방과 대청, 독서실, 스승의 거처, 토론하는 교육장 등이 있었다.

박만환은 1909년에는 영주정사 뒤편에 영양사(瀛陽詞) 사당을 지어 기자(箕子)와 공자(孔子), 그리고 안자,증자,지사,맹자 등 4성과 주렴계,정명도,정이천,장횡거,소강철,주자 등 6현을 차례로 봉안했다.

당시 3천석 부자였던 창암은 영주정사를 세우고 1년에 3백석씩 사재를 출현하여 모든 학생에게 숙식을 책임졌고, 간재 선생과 같은 석학을 초빙하여 4년 동안 130여 명을 길러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금둔 박승규(1894-1925)도 1919년 승동학원을 설립하고 수년간 150여 명을 배출하는 등 신학문교육에 힘썼다.

박승규는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자 영주정사에서 공부하던 11명의 지사들과 함께 공평동에 있는 이심정(怡心亭)에 모여 망국제를 지내기도 했다.

창암 박만환은 영주정사 등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한편 40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독서를 즐겼고, 기차와 배를 이용해 수년간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창암과 금둔은 후진 양성뿐만 아니라 을사늑약 후에는 의병장 면암 최익현에게 여러 차례 자금 지원을 했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천황이 내린 은사금을 거부했다. 또한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했으며, 독립운동자금 전달 등 민족의식도 각별한 지식인이었다.

영주정사가 설립된 이후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하는데 기여한 인물로는 김형재(영주정사 훈장), 간재, 박채환, 김준영, 송병선 등이 있다.

간재(1841-1922)는 을사오적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상소문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주정사와 밀양박씨 재실인 함훈재(銜訓齋)에서 여러 차례 강학 활동을 하였다. 간재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영주정사에 정착했던 것은 박씨 집안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간재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영주정사를 중심으로 정읍 지역에 정통 성리학이 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박만환이 설립한 영주정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 중에는 간재를 비롯해 김성수, 백관수, 김연수, 백정기, 김병로, 권순명, 김택술, 최영대, 고석진, 고예진, 최동규, 나용균, 채용신 등이 있다.

조선말 유명화가 채용신(1850-1941)은 22세 되던 해에 대원군(이최응)의 초상화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영조와 고조어진, 고운 최치원, 면암 최익현, 매천 황현, 돈헌 임병찬, 간재 전우, 찰방 박만환, 김석곤, 권순명, 김직술, 장태수 등 초상화만 70여 점을 그렸다. 그는 말년에 정읍 신태인에서 살았다.

한편,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은 월봉산 중턱 상월정(上月亭)에 자리하고 있다. 춘강 고정주 선생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내려와 설립한 사립학당이다.

1908년에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발전시켜, 국사, 영어, 일어, 한문, 산술 등을 배우는, 당시로서는 신학문 학당이었다. 그 후 창흥학교로 개명됐다가 훗날에 창평초등학교가 되었다.

창흥의숙은 호남 최초의 근대학교로 학교운영경비 등 일체를 만석꾼인 고정주 선생이 부담했다.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주는 소년 시절 상월정(전남문화재자료 제17호)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했다. 22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89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노 대신들을 처형할 것 등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규장각 직각(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영학숙을 세우고, 서울에서 영어 선생 이표를 초빙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기틀을 마련했다.

'영학숙'과 '창흥의숙'을 통해 춘강의 두 아들과 사위인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근촌 백관수, 현준호, 김연수, 김시중, 양태승 등 50여 명이 수학했으며, 특히, 장흥고씨, 전주이씨, 함양박씨, 김해김씨 가문에서 신학문교육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구한말 창평 출신 유림 고정주의 신문명 자각과 교육사업에 대한 투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앙의 벼슬을 경험으로 지방에 낙향하여 학숙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던 그는 선견지명한 호남교육의 선구자였다.

창암 박만환이 세운 '영주정사'와 관련 인사는 구학문을 바탕으로 한 의병계열의 민족운동을 했다면, 춘강 고정주가 세운 '영학숙' 관련 인사는 신학문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두 곳은 한국근대사에서 호남지역 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형영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