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이니 33년 전 이다.
1970년은 힘쎈 사람이 해먹던 시대라 부모는 어린 나를 '태권도장'을 다니게 했던 것 같다.
힘없는 부모는 아들이 강한 태권도사범으로 활동했던 것을 좋아 했었다.
계림초등학교 4학년 이후 충장중학교 3학년 시절엔 국기원에서 시합을 뛸 정도로 열정이 있었고, 육군(군 태권도선수)12사단을 제대하자 마자 태권도장을 차렸다. 돈은 많이 벌었으나 갈수록 불행한(태권도계의 불평등) 현실을 타파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글을 토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글 같지도 않는 글을 쓰면서 고등학교 다닐 적에 호남예술제에서 운문부 우수상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의 태권도업계는 부패의 뷔페식당같은 덩어리였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부패를 가장 싫어 했었다.
태권도업계가 돈과 권력에 집착한 집단으로 보일무렵 나는 사회의 모순과 홀로 싸우는 의적이 되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중략...... 다음 칼럼에 연재합니다.
운동을 하면서 간혹 詩를 태권도 신문에 게재했던 기억을 더듬어 사진과 추억을 남겨보려 합니다. 19889년도 부터 120개국에 3년 동안 연재한 예전 것이니 치졸한 습작에 불과하지만 용기 내어 올려봅니다.
고성중 (52)
광주출생
전문분야-르포기사, 기자아카데미 100회 이상, 뉴스로 홍보하기, 초보객관적글쓰기 등을 저서하고 2010년 10월9일 한글 날의 의미를 새기며 한국시민기자협회를 창립한다.
2014년 3권의 책(뉴스마케팅, 언론홍보 3.0시대, 뉴스로 홍보하기)을 집필하고 한국저널리스트대학 교육원을 만들었다. (전국 40여명의 교수 임명, 전 기무사령관 허평환 총장임명)
2015년 전남특산물홍보단 500여명의 홍보군단을 조직 중이며. 협회 기자는 900백여명이며 전국 10개 지회가 활성화 중이다.
현, 한국시민기자협회 사무총장겸, 한국저널리스트대학 이사장, 1일 10만이 넘는 뉴스포털 1의 발행인겸 편집장이다.

2001년 9월21일 -국제태권도신문- 13면
-생명의 차기-
시인은
아름다운 서체 연습하며
베고픈 허기와 갈망 체운다.
불혹의 세월 속에
굴절된 각도 다르며
매일 부족한 차기를 수행한다.
오랜 전통대로 습작하여
강한 서체에 생명이 있듯
21세기 고난의 시간 속에서
칼바람 가르는 생명의 차기를 가지고
나는 나를 배우며
나는 나를 안다.
백 번을 차 보면 부드러운 것이 강하게 되고
수만 번 차 보면서
옆차기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더 깊은 차기의 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