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강강술래에는 ‘가마타기’가 없다
진도강강술래에는 ‘가마타기’가 없다
  • 전대상 시민기자
  • 승인 2014.07.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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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변남주 "강강술래 원조는 해남 우수영이다"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전대상 시민기자 ] “강강수월래♬” 이는 일제시기 강강술래 가사로 1927년, 『별건곤』 잡지에 실린 내용 중 일부이다. 우수영에서 구전되는 강강술래 전설을 소개했는데, 지금 가사와 다른 것 외에 몇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강강술래를 명량대첩의 승전요인으로 인식하였고, 호칭은 ‘강강수월래(强强隨月來, 强强水越來)’이며, 그 뜻은 ‘강한 적군이 달 따라 또는 바다 물을 건너 침범하니 나가 싸우자’인데 이순신 장군이 지었다 한다. 또 강강술래가 우수영에서 발원하여 호남은 물론 영남까지 유행하게 된 까닭 등도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전설의 축약이다. “연인 사이었던 봉녀와 정남, 명량해전 당시 봉녀는 육지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정남은 해전에 참여하여 승리하였다. 봉녀는 정남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았고, 둘은 울돌목에서 사망했다. 다음날 바닷가에는 바위 두 개가 솟아 올라왔다.
 
이름하여 ‘부부암’ 또는 ‘봉녀바위, ‘정남바위’라 칭하였다. 그런데 한 어부가 ‘부부는 무슨 부부냐’하면서 ‘형제암’이라 개칭했더니 이튿날 바위 하나가 슬펐던지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편, 마을사람들은 장사를 지내고 제사 때마다 남녀노소가 당시와 같이 강강술래를 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 원혼을 달랜다고 전라도나 경상도에서도 매년 가을철이 되면 강강술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일제시기 강강술래 관련 기사가 또 눈에 띈다. 1934년 8월 24일 조선중앙일보는 위와 같은 해남강강술래 뜻과 유래를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자하였다. 하지만 왜경은 기사를 강제로 삭제케 하였다. 명량대첩과 관련된 강강술래 기사를 허용할리 만무했다.
 
더 나아가 강강술래 연행마저도 어려웠다. 3.1운동이후에는 더욱 심했다. 살핀 바와 같이 강강술래는 전라우수영의 역사문화와 명량대첩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를 염두에 두면 좋겠다.

이제 문화재 강강술래의 원류를 밝혀보자. 해방이 되자 강강술래는 다시 부녀자들의 놀이로 성행하게 되었다. 보름달이 떠오르길 손꼽아 기다렸다. 특히 가을 절기인 음력 7~9월 보름달이 떠오르면, 전라우수영 관아터였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청춘남녀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특이 풍경을 민속학자들이 가만히 나두었을 리 없다. 그 중 김금자(1938~) 씨는 ‘프리마돈나’라 칭할 정도로 소리가 빼어났다.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강강술래 특기장학생으로 선발했다. 1959년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강강술래 선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강술래는 임동권(1926~2012) 교수의 조사 결과에 의하여 1965년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었는데 무형유산 중에서는 두 번째다. 당시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뛰는 원무(圓舞)가 중심이었다.

또 명칭은 ‘강강수월래’로 ‘해남우수영강강술래’가 아니었다. 대상지역은 해남과 진도가 선정되었다. 이듬해 해남에서는 김금자·김길임(1927~1999) 씨가, 진도에서는 양홍도(1900~1971)〮 씨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임 교수는 진도 양 씨에 대한 현지조사를 못한 상태에서 지정했다고 한다. 아무튼 강강술래는 두 계보 즉, 해남우수영제와 진도제로 나뉘어 출발했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진도 양 씨의 강강술래는 전수되지 못했으니 사실상 진도문화재강강술래는 소멸되고 말았다.

반면 해남은 1972년이 되어 군의 지원을 받은 지춘상(1931~2009) 교수가 우수영강강술래를 새롭게 안무하였다. 기존의 원무에 가마타기, 청어엮기, 고사리꺽자, 덕석몰기 등 우수영전래놀이를 추가한 것이다. 이는 박양애(1935~) 씨 등의 도움을 기반으로 했다. 이 작품은 1975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다음해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진도군 조담환(1934∼1996 당시 진도문화원장) 씨는 진도강강술래를 복원하기 위하여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1974년 진도민속놀이진흥회를 조직하고, 대통령상을 받은 우수영강강술래를 전수받게 하였다. 예능보유자인 해남우수영 김길임 씨와 박양애 씨를 개인적으로 설득하여 진도 지산면 인지마을 등에서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진도와 해남이 같아졌지만 진도강강술래에는 가마타기가 없다. 해남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4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문화재 강강술래의 원류와 중심이 진도로 귀착되어 해남은 생명력마저도 위태하다. 인간문화재 수에서 해남군은 두 명이나 진도군은 세 명으로 역전 되었다. 2000년 문화재 심사 당시 진도 후보는 사실과 다르게 양홍도 씨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강강술래의 원형보존과 전승을 위하여 학술서를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의 중심은 진도강강술래다. 실제로는 해남에서 가르친 우수영강강술래다. 심지어 우수영 김길임 씨는 진도 출신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해남에서는 우수영강강술래를 진도에 빼앗겼다며 울분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우수영강강술래를 널리 보급한 일은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의 왜곡은 용납할 수 없다. 강강술래는 해남군에서 보유한 유일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살폈듯이 담긴 뜻은 여타 예능과 같지 않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먼저 그 진실을 역사적으로 예술적으로 낱낱이 밝힌 다음 유네스코 지정에 걸맞는 세계문화유산으로 가꾸어 가야한다. 이를 위해 강강술래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따뜻한 지역공동체를 위하여 힘과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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