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김을규 기자] 김무성 의원은 현재 새누리당 당권에 가장 근접한 정치인이다.
7.14전당대회를 앞둔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와의 격차를 10%이상 벌이고 있다. 이는 미래를 향한 새누리당의 대표가 누가 적합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지지도가 점차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청와대의 독선을 견제하고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당심(黨心)과 일반 국민들의 심리가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김 의원이 지난해 9월에 만든 역사공부 모임인 '근현대사 연구교실'에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1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것을 보면 현 여권에서 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당권에 가장 앞서고 있는 김 의원의 정치인생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 인생 시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계의 재야활동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등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부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문화생으로 입문하면서 정치를 배우게 된 것이다.
민주화 투쟁으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시대를 연 1993년 김영삼 정부 하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사정비서관을 거쳐 1994년 당시 최연소 내무부 차관에 발탁됐다.
그리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초선으로 국회에 들어왔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김 의원은 신임을 받으며 나름 승승장구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으로 야당의원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재선 의원이던 2001년에는 이회창 총재의 비서실장으로 기용되었으며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적극 도왔으나 정권 창출에는 실패했다.
이어 2004년 탄핵역풍으로 박근혜 체제로 바뀐 한나라당에서 사무총장에 발탁되면서 이후 친박계 좌장이 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적극 지지한 후폭풍으로 2008년 이명박 정권 18대 총선에서 친이계가 휘두른 친박계 공천학살에 그도 희생양이 되면서 정치생명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당당히 출마해서 보란듯이 당선돼 돌아와 복당했다.
이는 그가 지금의 큰 정치인이 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명박 정권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여당의 원내대표를 맡았다.
원내대표 시절에는 야당에게 양보 할 줄 알고 말이 통하는 통 큰 정치를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김 의원의 정치 인생이 순탄치만 않았다는 것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또 받지 못하는 시련을 겪는다
새누리당 내에서 김 의원을 공천해야 된다는 의견이 우세 했지만,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김 의원을 외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 깊은 속내는 세종시 수정 논란으로 김 의원의 국가 미래에 대한 소신과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부딪혀 대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교육도시, 과학도시로 만들려고 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원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세종시에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보면 과연 원안으로 한 것이 국가 미래에 옳은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낙천이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김 의원은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지난 정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동안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무렵 외부에서 그를 영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화 되었다고 전한다.
박세일 한반도재단이사장은 국민생각을 창당하고, 정운찬 전 국무총리 가세설까지 더하면서
보수세력이 뭉치면 승산이 있다고 그를 영입할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도 신당을 창당해서 공동대표로서 총선을 치룰 것을 제안했다.
김 의원의 탈당은 기정사실화 됐고 선언문 발표만 남은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만약 김 의원이 탈당을 해서 신당을 창당하게 되면 새누리당으로선 총선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이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김 의원은 억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보수대분열을 야기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소속 출마도 하지 않고 백의종군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의리와 신의를 중요시 여기는 김 의원의 소신에 따른 결정이었다.
김 의원의 이런 충정어린 결정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이상의 의석 차지로 승리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후 2012년 대선에서 위기에 처한 박근혜 대선 후보의 요청으로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스스로 정부 임명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이 또한, 대선 승리의 원동력은 보수의 분열을 막은 김 의원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김 의원이 보수분열의 신당을 창당했다면 지금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을까?
김 의원은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를 통해 국회로 돌아온 이후부터 당권 도전에 대한 의사를 여려차례 피력했다.
유불리에 따라 움직이는 철새 정치인이 지탄을 받고 있는 정가(政街)에서 한결같은 김 의원의 소신있는 행동은 현재 지지율 1위의 유력한 차기 당권주자 반열에 국민들은 우뚝 올려놓았다.
이제 의리를 중요시하고 통 큰 정치를 지금껏 해온 '무성대장' 김 의원이 당대표를 차지할 수 있을는지 새누리당의 전당대회가 주목된다.
7.14전당대회를 앞둔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와의 격차를 10%이상 벌이고 있다. 이는 미래를 향한 새누리당의 대표가 누가 적합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지지도가 점차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청와대의 독선을 견제하고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당심(黨心)과 일반 국민들의 심리가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김 의원이 지난해 9월에 만든 역사공부 모임인 '근현대사 연구교실'에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1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것을 보면 현 여권에서 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당권에 가장 앞서고 있는 김 의원의 정치인생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 인생 시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계의 재야활동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등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부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문화생으로 입문하면서 정치를 배우게 된 것이다.
민주화 투쟁으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시대를 연 1993년 김영삼 정부 하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사정비서관을 거쳐 1994년 당시 최연소 내무부 차관에 발탁됐다.
그리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초선으로 국회에 들어왔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김 의원은 신임을 받으며 나름 승승장구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으로 야당의원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재선 의원이던 2001년에는 이회창 총재의 비서실장으로 기용되었으며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적극 도왔으나 정권 창출에는 실패했다.
이어 2004년 탄핵역풍으로 박근혜 체제로 바뀐 한나라당에서 사무총장에 발탁되면서 이후 친박계 좌장이 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적극 지지한 후폭풍으로 2008년 이명박 정권 18대 총선에서 친이계가 휘두른 친박계 공천학살에 그도 희생양이 되면서 정치생명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당당히 출마해서 보란듯이 당선돼 돌아와 복당했다.
이는 그가 지금의 큰 정치인이 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명박 정권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여당의 원내대표를 맡았다.
원내대표 시절에는 야당에게 양보 할 줄 알고 말이 통하는 통 큰 정치를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김 의원의 정치 인생이 순탄치만 않았다는 것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또 받지 못하는 시련을 겪는다
새누리당 내에서 김 의원을 공천해야 된다는 의견이 우세 했지만,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김 의원을 외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 깊은 속내는 세종시 수정 논란으로 김 의원의 국가 미래에 대한 소신과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부딪혀 대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교육도시, 과학도시로 만들려고 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원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세종시에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보면 과연 원안으로 한 것이 국가 미래에 옳은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낙천이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김 의원은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지난 정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동안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무렵 외부에서 그를 영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화 되었다고 전한다.
박세일 한반도재단이사장은 국민생각을 창당하고, 정운찬 전 국무총리 가세설까지 더하면서
보수세력이 뭉치면 승산이 있다고 그를 영입할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도 신당을 창당해서 공동대표로서 총선을 치룰 것을 제안했다.
김 의원의 탈당은 기정사실화 됐고 선언문 발표만 남은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만약 김 의원이 탈당을 해서 신당을 창당하게 되면 새누리당으로선 총선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이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김 의원은 억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보수대분열을 야기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소속 출마도 하지 않고 백의종군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의리와 신의를 중요시 여기는 김 의원의 소신에 따른 결정이었다.
김 의원의 이런 충정어린 결정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이상의 의석 차지로 승리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후 2012년 대선에서 위기에 처한 박근혜 대선 후보의 요청으로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스스로 정부 임명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이 또한, 대선 승리의 원동력은 보수의 분열을 막은 김 의원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김 의원이 보수분열의 신당을 창당했다면 지금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을까?
김 의원은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를 통해 국회로 돌아온 이후부터 당권 도전에 대한 의사를 여려차례 피력했다.
유불리에 따라 움직이는 철새 정치인이 지탄을 받고 있는 정가(政街)에서 한결같은 김 의원의 소신있는 행동은 현재 지지율 1위의 유력한 차기 당권주자 반열에 국민들은 우뚝 올려놓았다.
이제 의리를 중요시하고 통 큰 정치를 지금껏 해온 '무성대장' 김 의원이 당대표를 차지할 수 있을는지 새누리당의 전당대회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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