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영 작가 전시회
최지영 작가 전시회
  • 김진성
  • 승인 2016.11.2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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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민기자협회 뉴스포털1 김진성기자]

 신성과 권위의 해체를 통한 현상과 본질에 대한 사유


  작가 최지영의 작업은 한지를 바탕으로 금박과 제한적인 색채가 더해지는 극히 간명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일정한 정형의 틀을 지니고 있는 금박의 조각들은 비정형의 형태로 나열되며 공간을 구성한다.


그것은 특정한 사물을 지시하거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조형의 얼개를 이룬다. 이러한 재료의 물성들과 조형적 표현을 통해 작가는 극히 상대적인 가치를 나열하고 대비시켜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고자 함이 여실하다.


  주지하듯이 금은 대단히 강한 상징성을 지닌 물질이다. 권력과 힘, 부와 균형, 영원, 완벽 등을 상징하는 권위적이고 긍정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부처의 몸을 금분으로 칠하거나 금관을 씀으로써 권위를 한껏 드러내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 금의 절대적 상징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더불어 금은 천한 물질주의의 상징으로 악함이나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차용되기도 하여 성서에서의 금송아지(Golden calf)와 같은 표현을 낳기도 하였다.


  작가가 금을 작업의 매재로 사용한 것은 전통적인 금박기법에 대한 학습과정에서 포착된 작은 발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금박의 연습과정에서 사용한 저렴한 가금박을 변색시키는 과정에서 아교작업의 실수로 발견된 아주 작은 옥빛의 변색을 발견한 것이다. 본연의 목적과는 다르지만 작가의 섬세한 감성은 이를 포착하여 자신의 작업으로 수용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의 실수가 필연으로 변환되게 된 것이다.


  금박의 대체 물질인 가금박은 상대적으로 저렴하여 실험과 실습에 이용되는 가금박은 구리와 아연의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화려한 금빛의 현란함을 드러내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금과는 상관없는 구리와 아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란함은 금과 같으니, 작가는 이를 통해 현상과 본질에 대한 사고를 확장시킴으로써 자신의 작업 근간을 설정한 것이다.

 

그것은 금이 지니는 일반적인 속성과 상징에 대한 회의이며, 이의 확장은 온갖 고정불변의 가치로 여겨지는 권위와 신성, 혹은 기성의 가치들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변색을 통해 금으로 보여지는 물질의 가변의 역설과 그 과정에서 포착된 아주 작은 옥빛의 흔적을 통해 본질과 실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에 이르면 작가의 작업은 재료의 특성과 조형의 내용에서 벗어나 다분히 사변적인 것으로 변환되게 된다.


  더불어 사각으로 구획된 사물들의 반복된 설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의도적 설정임이 여실하다. 작가는 이를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되는 작업을 위한 사각의 테이블과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문, 그리고 이를 통해 보여지는 네모난 하늘 등으로 해설한다. 정연한 직선으로 구획되어진 사각의 틀은 엄격한 권위와 규율이자 질서이고 규칙이다.

 

작가는 이를 구속이라 해석한다. 엄격한 틀과 꼴은 물리적으로 발견되는 사물들이지만, 그것은 또 권위적인 기성의 가치관이나 경직된 규율이나 법칙 등으로 해석된다. 작가의 작업이 한지를 바탕으로 금박을 올린 형식을 띠고 있는 것 역시 전통적인 한국화의 그것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전통적인 권위와 엄격한 심미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화의 틀과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한 사각의 틀은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자 상황이며 조건인 셈이다.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금박은 본연의 현란한 화려함을 지닌 금의 물성과는 차이가 있다.

아교 등 물질을 통해 가공, 처리된 금박은 그윽하고 침잠된 깊이의 색으로 나타난다. 이는 금박 특유의 물성을 다스려 본인의 심미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더욱이 불변, 영원 등을 상징하는 금박의 빛을 거둬들이는 작업은 물성 자체에 개입하여 주관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비록 금이 영원불변하다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인위적인 처리를 통하여 단시간에 구축하고 이를 조형의 매개로 삼고 있다. 수없이 많은 시간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작위의 흔적을 작위적 과정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다.

 

이는 작위적 행위의 산물이지만, 그 결과는 또 다시 무작위적인 것으로 나타남은 흥미롭다. 즉 작가의 행위와 물성의 특질이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내는 것으로, 우연과 필연, 작위와 무작위가 결합된 결과이다.


  불변과 영원, 권위와 신성 등을 나타내는 금이라는 물질을 통해 작가는 우연히 발견된 작은 틈새를 통하여 그 불변의 가치들로 치장된 이면을 들춰봄으로써 돌연 신성과 권위를 해체시켜 버린다. 그것은 합리적인 기성의 가치들을 일거에 허물어 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현상적인 것들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이는 금으로 표현되는 물질 제일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반성일 수도 있으며, 합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온갖 기성적 가치에 대한 심각한 성찰의 제시라 할 것이다.

 

나아가 육안에 의해 발견되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 심안으로 포착되는 내면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에 더해지는 사각의 틀로 규정된 사물들의 배치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작가의 사유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분명 새로운 표현 방식과 실험을 통한 개성적인 것이다. 이는 기존의 한국화가 답습하고 있는 전통적인 것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작가의 실험은 과격하고 파괴적인 것은 아니나 그 제시된 물음은 자못 심각하다. 향후 작가는 이를 더욱 확장시켜 우주와 심해 등 가상과 미지의 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이는 작가의 실험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작가의 관심은 재료의 물성을 통한 실험의 과정을 거쳐 점차 현상과 본질이라는 상대적인 가치의 극진한 대비를 통해 그 사유의 진폭을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다음 성취를 기대해 본다.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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