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충곤 저서]도곡 대곡리 청동유물 출토지 정비 복원
[구충곤 저서]도곡 대곡리 청동유물 출토지 정비 복원
  • 한국시민기자협회
  • 승인 2014.04.0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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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대곡리 출토 유물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대곡리 유적은 1971년에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여러 유물이 일괄적으로 확인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형동검과 팔주령을 비롯하여 도합 6종 11점이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2년 3월 2일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대곡리 유적은 구재천(具在天)이 집 바깥에 배수로를 설치하다가 발견하였다. 유적과 유물의 발견 경위를 보면, 구재천씨가 북쪽의 담장 밖으로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면서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곡괭이로 땅을 계속 파는 와중에도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으며, 고철 같은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확인되었다. 집주인은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뒤 엿장수에게 이 고물을 팔았으며, 물건을 건네받은 엿장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전남도청에 신고를 하여 발굴 조사에 이르게 되었다.
대곡리 유적에서는 국보 143호로 지정된 청동 예기(禮器) 11점이 출토되는 등 유물의 수량이 많고 종류가 다양한 편에 속한다. 또한 유물 출토지의 상황을 조사한 결과 적석목곽분에 속한 무덤의 구조가 남아 있어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 구충곤 전 총장
전남지역에서 세형동검을 비롯한 세문경, 동과, 동모, 영패류 등 청동기가 일괄로 출토된 유적은 화순 대곡리와 함평 초포리 유적이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영암 신연리에서 동모와 동제검파두식, 나주 청송리에서 세형동검, 고흥 소록도에서 조문경․석부․석촉이 출토되었다.
또한 함평 월산리와 장흥 학송리에서 동과, 강진 치흥리에서 동모가 출토되었고, 영암에서는 세문경․동모․세형동검 등이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전남지방의 경우 세형동검 등 후기 청동기시대 유물은 함평․화순․영암 등 영산강 유역의 중․하류지역에서 주로 확인되고, 앞선 시기의 비파형동검 등 초기 청동 유물은 보성강 유역과 남해안지역에서 출토되어 지역 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영산강 유역은 우리나라 청동기 밀집 출토지역의 하나이며,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용범은 청동기가 자체 생산되었음을 입증한다. 전남지역은 송국리유형의 문화에 기반한 토착사회가 세형동검문화를 받아들이며 초기 마한사회의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마한은 삼한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 맹주적 지위를 차지한 선진세력이었다. 마한은 진․변한에 비해 인구도 많고, 세형문화 단계에서는 정치․문화적인 발달 정도도 선진적이었다.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권위와 경제적인 부의 상징인 청동 제품을 다량으로 부장한 분묘 유적들이 집중 분포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B.C. 2세기가 되면 금강 유역뿐만 아니라 영산강 유역에도 청동방울과 세문경, 동과 등을 부장한 당대 최고위 사람들이 묻힌 무덤이 등장하게 된다.
팔주령 등 방울류는 샤만(原始宗敎主宰者)의 무구(巫具)로 추정되고, 세형동검 등 무기류는 권력을 소유한 집단의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들 무덤에 묻힌 사람은 의기와 병기를 바탕으로 주민에게 강제력을 구사하는 최고 권력자로서 제사와 정치를 관장하였던 인물로 짐작된다.

권력층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물은 세형동검과 팔주령 외에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수레를 들 수 있다. 또한 세형동검과 관계가 있는 적석목관묘가 서북한, 동북한, 그리고 일본 구주지역에도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세형동검문화의 원거리 연결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B.C. 2세기가 되면 금강유역뿐만 아니라 영산강유역에도 청동방울과 세문경, 동과 등을 부장한 당대 최고위 사람들이 묻힌 무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B.C. 2세기 후반대로 시기가 내려오면 세형동검이 부장된 영산강유역의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된 청동 유물의 종류와 양은 금강유역을 앞서기도 한다.
이는 마한의 중심세력이 금강유역에 국한되지 않고 영산강유역으로도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대곡리 유적은 우리 화순을 비롯한 전남지역이 세형동검문화 단계에 이르러 충청지역과 더불어 문화 선진지대로 부상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대곡리 유적은 최근에 이르러 36년 만에 국립광주박물관이 다시 발굴하여 무덤 구조를 확인하였고, 1차 발굴에서 빠뜨린 유물을 수습하였다. 매장시설은 풍화한 암반층을 파내고 마련했다. 묘광(墓壙)은 상하 2단으로 파내는 방식으로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상층 1단은 동-서 330㎝, 남-북 280㎝의 평면 방형에 가까웠으며, 깊이는 동쪽 기준 85㎝ 가량이었다.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좁은 묘광이 발견됐다. 규모는 동-서 230㎝, 남-북 105㎝, 깊이 65㎝인 평면 장방형이었다.
묘광 바닥면에서는 목관 바닥면 흔적이 관찰됐다. 그 범위는 동-서 115㎝, 남-북 40㎝ 안팎이었으며 서쪽 끝부분에서도 일부 목관 흔적이 드러났다. 목관을 놓았던 외곽 중 북쪽에서는 25㎝ 내외의 깬돌을 1열로 쌓았음이 밝혀졌다. 이들 채움돌과 목관 사이에는 두께 10㎝ 안팎의 회백색 점토가 발견됐다.
대곡리 유적은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장 보존과 유적 관리에서 심각한 문제점은 안고 있다. 유적 현장은 버려진 창고와 함께 시멘트 도로가 덮고 있었으며, 그 주변은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폐창고가 암반층을 파내고 축조되는 바람에 유적 지형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등 문화유적 보존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곡리 유적의 보존과 관리 상태는 우리 지역 문화 행정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대곡리 유적의 체계적 관리와 유적 보존 및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조사와 활용방안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유적지 입구의 고인돌군 7기 및 주변 유물 산포지와 연계하여 조사할 필요가 제기된다.
유적의 조사를 통해 성격과 실체가 드러나면 인근지역을 매입하여 유적공원으로 조성하고, 기념관 혹은 박물관을 조성하여 관광지로 활용했으면 한다. 또한 박물관 조성은 대곡리 유물 외에 고인돌공원과 고분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함께 전시하면 어떨까 한다. 그 외에 화순 관내에 속한 운주사와 쌍봉사 등의 유적과 유물을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복합전시관의 설치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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