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배 세상읽기]만나면 소통한다- 막힘없는 흐름
[이하배 세상읽기]만나면 소통한다- 막힘없는 흐름
  • 이하배 기자회원
  • 승인 2014.04.0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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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철학 박사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우리말 소통은 트이다, 성기다의 성길 소(疏) 자와 통하다, 오가다, 꿰뚫다의 통할 통(通) 자로 구성된다. 발(疋), 흐르다(流), 길(甬), 그리고 가다(辶)로 구성되는 소통(疏通)의 어원적 의미는 흘러감과 그 수단 내지 주체를 함께 지시한다. 따라서 소통은 ‘물질이나 기호가 막힘없이 흐름 내지 오고감’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영어 communication이 메시지의 교환의 의사소통을 의미함에 비해, 우리말 소통은 물질 자체의 흐름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소통의 의미는 의사소통의 뜻을 훨씬 넘어 생각이나 감정의 흐름은 물론, 교통의 흐름, 자연물의 흐름 내지는 ‘새로운 자와 묵은 자가 교대로 자리를 사양함’을 의미하는 신진대사(新陳代謝)까지 포괄한다.
차도의 도(道), 혈관의 관(管), 물길의 길, 숨통의 통(筒)은 모두 막힘없이 ‘갈 수 있는’(辶) ‘길’(甬)의 통(通)과 통한다. 막히면 못 산다. 나를 알리고 상대를 알고 싶어서든, 몸이 건강하고 기분이 상쾌하고 싶어서든, 가고 싶거나 가야 하는 길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든, 가고 오는 길이 활짝 열려 활발(活潑)하게 오갈 수 있기를 사람들은 원한다.

자연을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일하든 놀든, 사람들은 소통 없이는 살 수 없다. 만남이나 교환 없이, 오고감이나 움직임 없이 삶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함께 노동하고 놀면서 사랑하고 문화를 창조해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노동, 놀이, 생각, 소통, 사랑, 문화 등 모든 삶의 활동은 하나의 방식으로 만남을 전제하고 결과한다. 생존 수단을 확보하며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간접적으로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을 혹은 자신을 만나면서, 말과 생각이 생겨나고 소통과 놀이가 생겨난다. 일정한 시공의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 이러한 만남과 소통이 되풀이 되는 가운데 하나의 형태를 갖추면서, 관습과 제도, 전통이 생겨나고 삶의 일정한 방식인 문화가 형성된다 할 것이다.

남은 나를 뺀 나머지 모두를 지칭한다. 이를 ‘나바’( )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바’인 ‘남’의 외연은 세상에서 사람을 뺀 나머지도 모두 포함한다. 이 나머지 모두는 ‘자연’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세상’은 주로 지구를 일컫고, ‘사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까지도 포함한다. 이제 사람과 자연, 나와 남이 구분되었다.
만남에서 마주 나온 나는 ‘마주하는 상대’(Gegen-stand)에게 끊임없이 메시지와 물질을, 또 하나의 물질을 매개로 ‘떼어 보내고’ 상대로부터도 이들을 ‘맞이하여 받는다’. Gegenstand(게겐슈탄트)는 내가 마주 대하고(gegen) 서있는 어떤 것(Stand)인데, 보통 ‘대상’(對象)으로 번역된다. 만남 없는 소통은 없으며, 소통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만남의 본질은 소통이다. 동시에 발생하는 ‘만나는 떠남’ 내지 ‘떠나는 만남’은 움직임이요 흐름이요 소통이다. 움직임의 속도나 움직임의 능동과 수동에, 움직이는 것이 물질이냐 정신이냐에, 혹은 사람이냐에 무관하게,

소통에는 만남과 떠남의 요소가 늘 같이 한다.
가는 것이나 오는 것은, 한 곳을 떠나 만나러 가거나 만나러 오는 것이다. 나로부터 나와서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게로 떨어져 나아가는 말이나 물건도, 나에게는 떠나는 것이고 상대에게는 만나는 것이다. 어디를 향해 떠-나아가든, 어디에서 떨어져 나아가든, 소통의 떠남과 만남은 모두 움직임이다. 만나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만나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소통이다. 주고받는 영향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소통의 두 의미
광의의 소통은 ‘흐름’이고, 협의의 소통은 ‘흐르게 함’이다. 광의의 소통은 자연물의 오고감과 흐름까지를 포함하고, 협의의 소통은 사람이 ‘기호를 통해 상대와 정신적 메시지를 주고받기’ 혹은 ‘나와 상대의 생각이 서로 오고가게 함’만을 의미한다. 광의의 소통은 가고 옴이고, 협의의 소통은 보내고 받음이다. 이 책에서 소통은 의사소통의 상위개념이지만, 좁은 의미로도 쓰여, 자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지시할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소통의 개념으로, 사람들이 자연과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더 물을 수 있고 더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협의의 소통개념이라도 광의의 소통개념과 이어지는 맥락에 놓일 때, 그 방법론적 함의는 달라질 것이다.

사람의 삶은 늘 소통이 함께한다. 만남에서 소통이 안 되고 있어 보여도, 이는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불통일 뿐, 비록 작은 소통이더라도, 소통은 늘 일어나고 있다. 또, 하나의 소통이 갈등과 긴장을 안고 있는 소통이더라도, 소통은 소통이다. 아무리 일방적인 통고라 하여도, 그 메시지 중 약간은 들렸을 것이며, 긍정되고 수용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일방적인 통고가 초래하는 변화 내지 움직임은 지대할 수 있다. 저수지 뚝에 난 틈새의 미세한 흐름도 나중에 거대한 물난리를 수반할 수도 있다. 아무리 강변북로가 정체라 해도 느린 움직임은 있으며, 또 시간이 지나면 정체는 다시 풀리게 된다.

소통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침묵의 만남이나 싸움의 만남도 역시 소통의 한 방식이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소통하고, 자연물과 만나면서 소통한다. 아니, 죽기 위해서 혹은 죽이기 위해서조차도 그런다. 만나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모든 종류의 행위를 의사소통으로 이해하는 오스트리아의 소통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사회학자, 철학자인 바츨라빅(Watzlavick, 1921~2007)은 ‘사람은 (의사)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소통의 있음과 없음보다 소통의 모습과 크기가 함께하는 삶에서 중요한 문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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