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배 세상읽기]끊임없는 만남들
[이하배 세상읽기]끊임없는 만남들
  • 이하배 기자회원
  • 승인 2014.04.03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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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철학박사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사람들의 삶은 만남의 연속이며,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만남들의 총합이다. 사람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만나는 속에, 사람이 사람과 하나의 방식으로 만나면서 태어나는 사람탄생 자체가, 만남의 맥락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난 후에도 먹기, 거주하기, 입기, 사랑하기, 놀기 등 살기 위해 자연과든 사람과든 늘 만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물질적 정신적 수단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이용할 때, 나도 삶의 물질적 정신적 수단들을 생산하여 이들에게 떼 어 준다. ‘죄송하지만, 나는 공부만 하고 있는데요~.’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 나 공부하는 나는 선생님의 지식과 농부의 쌀, 의류 노동자의 옷을 구매하며 소비자로도 살아가지만, 나의 공부는 미래에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어 떤 것을 생산함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한 낱의 씨앗을 뿌리고, 삽으로 땅을 일구는 일에 는 어떤 만남들이 숨어있을까? 이 사람은 우선 일궈진 땅과 만나고 삽과 만나고 씨앗과 만난다. 그리고 바람과도 만난다. 이들은 모두 직접 보거 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일궈진 땅은, 사람이 이미 자연을 도구 와 함께 만난 결과다. 준비한 씨앗도 자연과 사람을 이미 만난 결과다. 또 한, 농기구 삽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려보고 계획하고 손으로 만들어 낸 손길, 생각길이 담겨 있다. 이 일에도 이미 만들어진 도구들이 사용된 다. 여기에 언젠가 개발한 경작 법에 대한 두뇌활동과 이를 전수하고 전수 받는 교육활동도 첨가된다. 지나간 것이라서 안 보이고, 정신적인 것이라 서 안 보일 뿐이다. ‘이미’라는 말은, 어떤 것을 사람들의 손길, 발길, 말길, 생각길이 만나 고 스친 흔적(痕迹)을 지시한다. 바람조차도 이미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만난 바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미’를 싫어하여, 다시 재활용품을 만나는 일에 질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앉은 택시나 식당의 자리, 남 이 들이키고 내쉰 공기, 남이 건넌 돌다리, 남이 본 남산, 남과 악수한 이 성 친구, 남이 불렀던 노래 등을 만나지 않고 독야청청(獨也靑靑) 살 수 있을까? 22 소통 열음 이렇게, 한 삽 뜨고 심는 행위에도, 보이지 않는 물질적 정신적 만남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삶은 사람이나 자연과의 수많은 정신 적/물질적, 실천적/이론적, 직접적/간접적, 보이는/안 보이는, 언어적/비언 어적, 의식적/무의식적, 사실적/당위적인 만남들로 구성된다 할 것이다. 그 렇다면 만남은, 자연 속 사회적 삶의 구성벽돌인 셈이다. 이렇게 자연 속에 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 신적으로 만나고 나누지 않고서는, 개인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삶은 사회적으로만 가능하며, 그의 삶 내지 죽음의 방식도 그가 속한 사회의 ‘크 기’ 내지 ‘모습’에 좌우된다. 만남은 서로 ‘마주 나옴’, ‘나와서 마주 함’을 이른다.

만남의 분절음은 ‘ㅁ +ㅏ+ㄴ - ㄴ+ㅏ+ㅁ’ 혹은 ‘man - nam’이다. 여기에서 비록 우연일지라도, 만 남의 두 주체(man)가 ‘마주 나와’ 서로를 향한다. 만남은 마주 나와 만나는 두 주체의 틈을 없애거나 잇기를 뜻한다. 만남은 이미 떠남의 차원을 포함 한다. 벗어나기나 떨어지기를 의미하는 ‘떠남’의 떠나다는 ‘뜨다’와 ‘나다’로 이루어진다. 따다, 떨다, 떼다, 떨어지다 등의 밑말이 되는 ‘뜨다’는, 우선, ‘떨어져 틈이 생기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떠남은 ‘떨어져 나감’을 의 미한다. 붙어 있고 이어져 있고 만나 있던 것들이 떠날 때, 사이와 거리가 만들어지고 벌어진다. 서로를 전제 삶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만남과 떠남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움직임, 흐름, 소통에서 만남과 떠남의 두 측면이 늘 같이 한다. 같은 움직임이지만, 한 쪽에서 보면 만남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떠남이다. 걸음걸이가 지면과의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동작의 반복이듯, 우리들의 행 동(行動) ‘걷는 움직임’도 만남과 떠남의 반복이다. 사람들은 사람과 혹은 사물과 늘 붙어 살 수도 없듯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붙어있기나 떨어져 있기는 움직임 없음, 소통 없음 그리하여 삶 없음 내지 죽음을 뜻한다. 만남과 떠남의 관계를 두 측면에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만남과 떠남은 서로를 전제하고 또 결과한다는 측면이고, 하나는 이들이 늘 같이 한다는 측면이다. 만남은 떠남의 전제이고, 떠날 때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남은 다시 떠남 의 결과가 된다.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함은, 반대에서 나오고 반대를 향 할 운명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만난 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는 회자정리 (會者定離)를 말하지만, 이 만남은 이미 떠남을 전제한다. 떠남과 만남의 대상을 놓고 보면, 하나의 대상을 떠나고 다른 한 대상을 만난다. 이런 만남과 떠남의 두 동작은, 이시(異時)에 일어난다. 한 대상을 떠난 후 다른 한 대상을 만나고, 이를 만난 후 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갑동이 를 떠나 갑순이에게 간다면, 이는 하나를 떠남이요, 그 후 다른 하나를 만 남이다. 그러나 만남과 떠남의 움직임을 하나로 보면, 떠남 자체가 동시(同時)에 만남이다. 하나의 동작이 움직임의 연속일 때, 이는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 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만남과 떠남의 계기를 모두 가지므로, 떠남은 만남을 포함하고 만남은 떠남을 포함한다. 만남 과 떠남이 동전의 양면이라 함은, 한 면이 반대 면과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 24 소통 열음 아니라, 반대의 계기가 이런 식으로 늘 같이 한다는 뜻이다. 한 대상을 떠나 얼마간 이동 후, 다른 대상을 만난다 하여도, 두 대상을 포괄하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도 역시 하나를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의 사물을 뒤로 보면 떠남이고, 앞으로 보면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는, 만남과 떠남의 대 상이 정해져 있든 있지 않든, 모든 움직임은 떠나는 만남이요, 만나는 떠남 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만남과 떠남을 ‘동시성’과 ‘이시성’으로 본다는 것은,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구조주의와 기호학의 초석을 다진 소쉬르(Saussure, 1857~1913)가 말한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의 개념 쌍과 일정하게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삶의 모든 동작들이 만남과 떠남인가? 가고 오는 움직임은 한 곳을 떠나 또 한 곳을 만나는 동작이다. 숨 쉬는 동작은 공기와 만나고(吸) 공기를 떠 나보내는(呼) 동작이다. 먹고 배설하는 동작은 음식물을 들이고 내는 동작 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오고가거나 주고받는 소통의 동작 은 또, 매매하는 동작과 같은 논리가 아닌가? 2011년 6월 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어느 커피전문점에서는 가게 안팎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커피와 돈을 주고받는다. 말의 흐 름과 함께 커피와 돈이 사람의 만남 속에 흐르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 이 오가지 않을 때, 커피와 돈은 오갈 수 없다.

어떤 말은 커피를 사고파는 말이고, 어떤 말은 담소하는 말이다. 어떤 말은 협의의 구어이고, 어떤 말은 몸과 표정으로 하는 몸짓언어이다. 말로써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보내고 받는다. 이 커피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만나면서 만들어낸 산물인데, 이들 이 자연을 만날 때, 또 다른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얻어낸 도구를 사용한다. 자연을 만날 때, 자연은 자연대로 흙이나 물, 바람, 생물 등이 움직이면서 서로 만나며 떠나고 있는 중이다. 파종할 때, 많은 만남들 이 얼키설키 함께했던 것처럼...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만남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만남관계’ 내지 ‘만 남문화’의 개념으로, 함께하는 삶의 모습과 방식, 수준을 더 묻는 일이 가능 할 것이다. 만남이 떠남을 전제하고 결과한다는 의미에서, 넓게 보면 떠남 도 만남 방식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떠남을 떠나 만남을 말할 수 없지만, 우 리는 만남을 중심으로 말한다.

우리가 보통 ‘나는 오늘 아무개를 만났다.’라 말하지, ‘아무개를 만난 후 떠났다.’ 혹은 ‘아무개를 떠났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필요 없어 떠나는 떠남보다는, 필요하여 만나는 만남의 요소가 더 중요해서일까? 만남은 만날 상대와 결정할 문제지만, 떠남은 내가 홀로 결정할 수 있어서일까? 먹을거리를 찾아 자연을 만나고, 찾은 것을 몸과 만나게 하 는 일이 삶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 식당에 가는 일보다 화장실 가는 비용이 훨씬 덜 해서일까? 물고기를 낚아 요리하는 일보다, 먹고 소화하여 배출하는 일이 쉽다 할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나 삶을 어렵게 하는 것들이 풀어야 할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를 먼저 말한다. 불이 나면, 사람들에 인사하기 전에 ‘불이야!’를 먼저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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