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때 신종 임금이 여러 조신을 거느리고 미복차림으로 백성의 삶을 살펴보고자 무등산까지 시찰을 오셨다가, 다시 화학산을 향하는 길에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산길을 걷던 왕은 목이 말라 우물을 찾던 중에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샘가에서 나물을 씻던 김씨 처녀를 보게 되었다.
신종은 심한 갈증으로 왕실의 법도를 망각하고 친히 샘까지 찾아들었다고 한다, 왕은 김씨 처녀에게 “애야, 어서 물 한 그릇 달라!”하고 말씀하셨다. 처녀는 얼굴을 돌려 왕을 우러러보면서 공손한 태도로 물동이에 있는 바가지로 샘물을 떠서 옆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아 주르륵 몇 잎사귀를 따 물위에 띄웠다.
왕은 괴이하게 여겨, “애야! 네 어찌하여 이 물위에 버들잎을 띄우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처녀는 “혹시 급체하시어 병이 되실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아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처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시고 버들잎을 불어가면서 천천히 물을 마셨다고 한다.
왕은 떠나면서 처녀의 이름을 묻고, “나는 경기도 개경(開京)에서 온 사람이다”이다는 말을 남긴 후 바쁜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하였다. 왕은 여러 지역의 민정을 골고루 살핀 개경으로 환궁하였다. 그 뒤 왕은 궁중에서도 항상 시골소녀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초하게 빼어난 기품과 우아함이 넘치는 자태며 버들잎을 따서 물에 띄워주던 그 기특한 지혜가 항상 왕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왕은 아리따운 쳐녀를 잊지 못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어의를 불러 용체(龍體)를 보살피게 하였으나 병환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허약한 몸으로 정사를 살피기도 어렵게 되니 후사도 걱정이었다. 서둘러 태자에게 선위(禪位) 하고 또 태자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위를 물려준 신종 임금은 백관들과 상의하여 능성골 우물가에서 만났던 규수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벽한 시골의 아리따운 처녀는 마침내 간택되어 궁중법도의 예로써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꿈에도 생각지 못할 왕비가 태어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신종이 왕통을 태자에게 선위한 대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대비가 태어난 대비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신종과 처녀가 만난 샘을 왕비샘 혹 왕샘이라 하였으나, 마을 이름에 왕비도 좋지만 계집녀(女)가 붙어 가난하다는 풍설이 나돌아 비(妃) 자를 바꾸어 가릴비(庇) 자로 고쳐 대비리(大庇里)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이 샘도 이름을 바꾸어 참샘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남원윤씨 집안에서 왕비가 나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입향선조(入鄕先祖)의 연대가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사실의 기록도 없이 떠도는 말들이다고 한다. 실증이나 고증도 없이 왕비의 집터와 샘물만 남아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신종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왕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최충헌이 집정하며 왕권을 농락하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신종은 1197년에 왕위에 올라 1204년에 아들 희종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따라서 신종이 생전에 아들 희종에게 왕권을 물려준 것은 사실이며, 그 이유는 최충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퇴위한 것이었다.
신종의 재위 시에는 ‘만적의 난’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민란이 거듭되어 국왕이 한가롭게 산천을 유람하거나 민정시찰을 위해 전라도까지 왕래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신종과 대비리 출생 처녀의 운명적인 만남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신종과 대비리 출생 처녀의 혼담 설화는 태조 왕건과 나주 출신 장화왕후 오씨의 관련 설화를 차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태조와 장화왕후가 나주 완사천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가는 내옹은 다음과 같다.
처녀시절 오씨는 꿈에 포구(浦)의 용(龍)이 와서 배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놀라 깨어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궁예로부터 수군 장군으로 임명된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나주로 출정하여 목포(木浦, 현재의 영산포 택촌마을 부근)에 배를 머무르고 있었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후 제2대 혜종이 태어났는데,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를 써서 이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다.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완사천이 지금도 나주시청 앞쪽의 도로 옆에 있고, 그 옆에는 왕후의 비(碑)가 남아 있다. 구충곤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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