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삶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만남과 떠남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임, 흐름, 소통에서 만남과 떠남의 두 측면이 늘 같이 한다. 같은 움직임이지만, 한 쪽에서 보면 만남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떠남이다.
걸음걸이가 지면과의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동작의 반복이듯, 우리들의 행동(行動) ‘걷는 움직임’도 만남과 떠남의 반복이다. 사람들은 사람과 혹은사물과 늘 붙어 살 수도 없듯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붙어있기나 떨어져있기는 움직임 없음, 소통 없음 그리하여 삶 없음 내지 죽음을 뜻한다.
만남과 떠남의 관계를 두 측면에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만남과떠남은 서로를 전제하고 또 결과한다는 측면이고, 하나는 이들이 늘 같이 한다는 측면이다.만남은 떠남의 전제이고, 떠날 때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남은 다시 떠남의 결과가 된다.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함은, 반대에서 나오고 반대를 향할 운명을 가리킨다.
걸음걸이가 지면과의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동작의 반복이듯, 우리들의 행동(行動) ‘걷는 움직임’도 만남과 떠남의 반복이다. 사람들은 사람과 혹은사물과 늘 붙어 살 수도 없듯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붙어있기나 떨어져있기는 움직임 없음, 소통 없음 그리하여 삶 없음 내지 죽음을 뜻한다.
만남과 떠남의 관계를 두 측면에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만남과떠남은 서로를 전제하고 또 결과한다는 측면이고, 하나는 이들이 늘 같이 한다는 측면이다.만남은 떠남의 전제이고, 떠날 때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남은 다시 떠남의 결과가 된다.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함은, 반대에서 나오고 반대를 향할 운명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만난 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는 회자정리
(會者定離)를 말하지만, 이 만남은 이미 떠남을 전제한다. 떠남과 만남의
대상을 놓고 보면, 하나의 대상을 떠나고 다른 한 대상을 만난다. 이런 만
남과 떠남의 두 동작은, 이시(異時)에 일어난다. 한 대상을 떠난 후 다른
한 대상을 만나고, 이를 만난 후 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갑동이
를 떠나 갑순이에게 간다면, 이는 하나를 떠남이요, 그 후 다른 하나를 만
남이다.
그러나 만남과 떠남의 움직임을 하나로 보면, 떠남 자체가 동시(同時)에
만남이다. 하나의 동작이 움직임의 연속일 때, 이는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
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만남과 떠남의 계기
를 모두 가지므로, 떠남은 만남을 포함하고 만남은 떠남을 포함한다. 만남
과 떠남이 동전의 양면이라 함은, 한 면이 반대 면과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계기가 이런 식으로 늘 같이 한다는 뜻이다.
한 대상을 떠나 얼마간 이동 후, 다른 대상을 만난다 하여도, 두 대상을
포괄하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도 역시 하나를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의 사물을 뒤로 보면 떠
남이고, 앞으로 보면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는, 만남과 떠남의 대
상이 정해져 있든 있지 않든, 모든 움직임은 떠나는 만남이요, 만나는 떠남
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만남과 떠남을 ‘동시성’과 ‘이시성’으로 본다는 것은, 스
위스의 언어학자로 구조주의와 기호학의 초석을 다진 소쉬르(Saussure, 1857~1913)가 말한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의 개념 쌍과
일정하게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삶의 모든 동작들이 만남과 떠남인가? 가고 오는 움직임은 한 곳을 떠나
또 한 곳을 만나는 동작이다. 숨 쉬는 동작은 공기와 만나고(吸) 공기를 떠
나보내는(呼) 동작이다. 먹고 배설하는 동작은 음식물을 들이고 내는 동작
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오고가거나 주고받는 소통의 동작
은 또, 매매하는 동작과 같은 논리가 아닌가?
2011년 6월 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어느 커피전문점에서는 가게 안팎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커피와 돈을 주고받는다. 말의 흐
름과 함께 커피와 돈이 사람의 만남 속에 흐르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
이 오가지 않을 때, 커피와 돈은 오갈 수 없다. 어떤 말은 커피를 사고파는
말이고, 어떤 말은 담소하는 말이다. 어떤 말은 협의의 구어이고, 어떤 말은
몸과 표정으로 하는 몸짓언어이다. 말로써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보내고 받
는다. 이 커피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만나면서 만들어낸 산물인데, 이들
이 자연을 만날 때, 또 다른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얻어낸 도구를 사용한다. 자연을 만날 때, 자연은 자연대로 흙이나 물, 바람, 생물
등이 움직이면서 서로 만나며 떠나고 있는 중이다. 파종할 때, 많은 만남들
이 얼키설키 함께했던 것처럼...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만남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만남관계’ 내지 ‘만
남문화’의 개념으로, 함께하는 삶의 모습과 방식, 수준을 더 묻는 일이 가능
할 것이다. 만남이 떠남을 전제하고 결과한다는 의미에서, 넓게 보면 떠남
도 만남 방식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떠남을 떠나 만남을 말할 수 없지만, 우
리는 만남을 중심으로 말한다. 우리가 보통 ‘나는 오늘 아무개를 만났다.’라
말하지, ‘아무개를 만난 후 떠났다.’ 혹은 ‘아무개를 떠났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필요 없어 떠나는 떠남보다는, 필요하여 만나는 만남의 요소가 더 중요
해서일까? 만남은 만날 상대와 결정할 문제지만, 떠남은 내가 홀로 결정할
수 있어서일까? 먹을거리를 찾아 자연을 만나고, 찾은 것을 몸과 만나게 하
는 일이 삶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 식당에 가는 일보다 화장실 가는 비
용이 훨씬 덜 해서일까? 물고기를 낚아 요리하는 일보다, 먹고 소화하여 배
출하는 일이 쉽다 할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나 삶을 어렵게 하는 것들이 풀
어야 할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를 먼저 말한다. 불이 나면, 사람들에 인사하
기 전에 ‘불이야!’를 먼저 이하배 세상읽기
(會者定離)를 말하지만, 이 만남은 이미 떠남을 전제한다. 떠남과 만남의
대상을 놓고 보면, 하나의 대상을 떠나고 다른 한 대상을 만난다. 이런 만
남과 떠남의 두 동작은, 이시(異時)에 일어난다. 한 대상을 떠난 후 다른
한 대상을 만나고, 이를 만난 후 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갑동이
를 떠나 갑순이에게 간다면, 이는 하나를 떠남이요, 그 후 다른 하나를 만
남이다.
그러나 만남과 떠남의 움직임을 하나로 보면, 떠남 자체가 동시(同時)에
만남이다. 하나의 동작이 움직임의 연속일 때, 이는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
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만남과 떠남의 계기
를 모두 가지므로, 떠남은 만남을 포함하고 만남은 떠남을 포함한다. 만남
과 떠남이 동전의 양면이라 함은, 한 면이 반대 면과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계기가 이런 식으로 늘 같이 한다는 뜻이다.
한 대상을 떠나 얼마간 이동 후, 다른 대상을 만난다 하여도, 두 대상을
포괄하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도 역시 하나를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의 사물을 뒤로 보면 떠
남이고, 앞으로 보면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는, 만남과 떠남의 대
상이 정해져 있든 있지 않든, 모든 움직임은 떠나는 만남이요, 만나는 떠남
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만남과 떠남을 ‘동시성’과 ‘이시성’으로 본다는 것은, 스
위스의 언어학자로 구조주의와 기호학의 초석을 다진 소쉬르(Saussure, 1857~1913)가 말한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의 개념 쌍과
일정하게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삶의 모든 동작들이 만남과 떠남인가? 가고 오는 움직임은 한 곳을 떠나
또 한 곳을 만나는 동작이다. 숨 쉬는 동작은 공기와 만나고(吸) 공기를 떠
나보내는(呼) 동작이다. 먹고 배설하는 동작은 음식물을 들이고 내는 동작
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오고가거나 주고받는 소통의 동작
은 또, 매매하는 동작과 같은 논리가 아닌가?
2011년 6월 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어느 커피전문점에서는 가게 안팎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커피와 돈을 주고받는다. 말의 흐
름과 함께 커피와 돈이 사람의 만남 속에 흐르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
이 오가지 않을 때, 커피와 돈은 오갈 수 없다. 어떤 말은 커피를 사고파는
말이고, 어떤 말은 담소하는 말이다. 어떤 말은 협의의 구어이고, 어떤 말은
몸과 표정으로 하는 몸짓언어이다. 말로써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보내고 받
는다. 이 커피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만나면서 만들어낸 산물인데, 이들
이 자연을 만날 때, 또 다른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얻어낸 도구를 사용한다. 자연을 만날 때, 자연은 자연대로 흙이나 물, 바람, 생물
등이 움직이면서 서로 만나며 떠나고 있는 중이다. 파종할 때, 많은 만남들
이 얼키설키 함께했던 것처럼...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만남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만남관계’ 내지 ‘만
남문화’의 개념으로, 함께하는 삶의 모습과 방식, 수준을 더 묻는 일이 가능
할 것이다. 만남이 떠남을 전제하고 결과한다는 의미에서, 넓게 보면 떠남
도 만남 방식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떠남을 떠나 만남을 말할 수 없지만, 우
리는 만남을 중심으로 말한다. 우리가 보통 ‘나는 오늘 아무개를 만났다.’라
말하지, ‘아무개를 만난 후 떠났다.’ 혹은 ‘아무개를 떠났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필요 없어 떠나는 떠남보다는, 필요하여 만나는 만남의 요소가 더 중요
해서일까? 만남은 만날 상대와 결정할 문제지만, 떠남은 내가 홀로 결정할
수 있어서일까? 먹을거리를 찾아 자연을 만나고, 찾은 것을 몸과 만나게 하
는 일이 삶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 식당에 가는 일보다 화장실 가는 비
용이 훨씬 덜 해서일까? 물고기를 낚아 요리하는 일보다, 먹고 소화하여 배
출하는 일이 쉽다 할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나 삶을 어렵게 하는 것들이 풀
어야 할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를 먼저 말한다. 불이 나면, 사람들에 인사하
기 전에 ‘불이야!’를 먼저 이하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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