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배 세상읽기]서로를 전제
[이하배 세상읽기]서로를 전제
  • 고성중
  • 승인 2014.04.01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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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철학박사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삶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만남과 떠남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임, 흐름, 소통에서 만남과 떠남의 두 측면이 늘 같이 한다. 같은 움직임이지만, 한 쪽에서 보면 만남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떠남이다.

걸음걸이가 지면과의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동작의 반복이듯, 우리들의 행동(行動) ‘걷는 움직임’도 만남과 떠남의 반복이다. 사람들은 사람과 혹은사물과 늘 붙어 살 수도 없듯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붙어있기나 떨어져있기는 움직임 없음, 소통 없음 그리하여 삶 없음 내지 죽음을 뜻한다.

만남과 떠남의 관계를 두 측면에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만남과떠남은 서로를 전제하고 또 결과한다는 측면이고, 하나는 이들이 늘 같이 한다는 측면이다.만남은 떠남의 전제이고, 떠날 때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남은 다시 떠남의 결과가 된다. 서로를 전제하고 결과함은, 반대에서 나오고 반대를 향할 운명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만난 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는 회자정리
(會者定離)를 말하지만, 이 만남은 이미 떠남을 전제한다. 떠남과 만남의
대상을 놓고 보면, 하나의 대상을 떠나고 다른 한 대상을 만난다. 이런 만
남과 떠남의 두 동작은, 이시(異時)에 일어난다. 한 대상을 떠난 후 다른
한 대상을 만나고, 이를 만난 후 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갑동이
를 떠나 갑순이에게 간다면, 이는 하나를 떠남이요, 그 후 다른 하나를 만
남이다.

그러나 만남과 떠남의 움직임을 하나로 보면, 떠남 자체가 동시(同時)에
만남이다. 하나의 동작이 움직임의 연속일 때, 이는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
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만남과 떠남의 계기
를 모두 가지므로, 떠남은 만남을 포함하고 만남은 떠남을 포함한다. 만남
과 떠남이 동전의 양면이라 함은, 한 면이 반대 면과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계기가 이런 식으로 늘 같이 한다는 뜻이다.
한 대상을 떠나 얼마간 이동 후, 다른 대상을 만난다 하여도, 두 대상을
포괄하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도 역시 하나를 떠나는 동시에 만남이고
만나는 동시에 떠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의 사물을 뒤로 보면 떠
남이고, 앞으로 보면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는, 만남과 떠남의 대
상이 정해져 있든 있지 않든, 모든 움직임은 떠나는 만남이요, 만나는 떠남
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만남과 떠남을 ‘동시성’과 ‘이시성’으로 본다는 것은, 스
위스의 언어학자로 구조주의와 기호학의 초석을 다진 소쉬르(Saussure, 1857~1913)가 말한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의 개념 쌍과
일정하게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삶의 모든 동작들이 만남과 떠남인가? 가고 오는 움직임은 한 곳을 떠나
또 한 곳을 만나는 동작이다. 숨 쉬는 동작은 공기와 만나고(吸) 공기를 떠
나보내는(呼) 동작이다. 먹고 배설하는 동작은 음식물을 들이고 내는 동작
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오고가거나 주고받는 소통의 동작
은 또, 매매하는 동작과 같은 논리가 아닌가?

2011년 6월 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어느 커피전문점에서는 가게 안팎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커피와 돈을 주고받는다. 말의 흐
름과 함께 커피와 돈이 사람의 만남 속에 흐르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
이 오가지 않을 때, 커피와 돈은 오갈 수 없다. 어떤 말은 커피를 사고파는
말이고, 어떤 말은 담소하는 말이다. 어떤 말은 협의의 구어이고, 어떤 말은
몸과 표정으로 하는 몸짓언어이다. 말로써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보내고 받


는다. 이 커피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만나면서 만들어낸 산물인데, 이들
이 자연을 만날 때, 또 다른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얻어낸 도구를 사용한다. 자연을 만날 때, 자연은 자연대로 흙이나 물, 바람, 생물
등이 움직이면서 서로 만나며 떠나고 있는 중이다. 파종할 때, 많은 만남들
이 얼키설키 함께했던 것처럼...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만남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만남관계’ 내지 ‘만
남문화’의 개념으로, 함께하는 삶의 모습과 방식, 수준을 더 묻는 일이 가능
할 것이다. 만남이 떠남을 전제하고 결과한다는 의미에서, 넓게 보면 떠남
도 만남 방식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떠남을 떠나 만남을 말할 수 없지만, 우
리는 만남을 중심으로 말한다. 우리가 보통 ‘나는 오늘 아무개를 만났다.’라
말하지, ‘아무개를 만난 후 떠났다.’ 혹은 ‘아무개를 떠났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필요 없어 떠나는 떠남보다는, 필요하여 만나는 만남의 요소가 더 중요
해서일까? 만남은 만날 상대와 결정할 문제지만, 떠남은 내가 홀로 결정할
수 있어서일까? 먹을거리를 찾아 자연을 만나고, 찾은 것을 몸과 만나게 하
는 일이 삶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 식당에 가는 일보다 화장실 가는 비
용이 훨씬 덜 해서일까? 물고기를 낚아 요리하는 일보다, 먹고 소화하여 배
출하는 일이 쉽다 할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나 삶을 어렵게 하는 것들이 풀
어야 할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를 먼저 말한다. 불이 나면, 사람들에 인사하
기 전에 ‘불이야!’를 먼저   이하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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