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물질적 정신적 수단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이용할 때, 나도 삶의 물질적 정신적 수단들을 생산하여 이들에게 떼어 준다. ‘죄송하지만, 나는 공부만 하고 있는데요~.’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하는 나는 선생님의 지식과 농부의 쌀, 의류 노동자의 옷을 구매하며소비자로도 살아가지만, 나의 공부는 미래에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어떤 것을 생산함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한 낱의 씨앗을 뿌리고, 삽으로 땅을 일구는 일에는 어떤 만남들이 숨어있을까? 이 사람은 우선 일궈진 땅과 만나고 삽과 만나고 씨앗과 만난다.
그리고 바람과도 만난다. 이들은 모두 직접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일궈진 땅은, 사람이 이미 자연을 도구와 함께 만난 결과다. 준비한 씨앗도 자연과 사람을 이미 만난 결과다. 또한, 농기구 삽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려보고 계획하고 손으로 만들어낸 손길, 생각길이 담겨 있다. 이 일에도 이미 만들어진 도구들이 사용된다.
여기에 언젠가 개발한 경작 법에 대한 두뇌활동과 이를 전수하고 전수
받는 교육활동도 첨가된다. 지나간 것이라서 안 보이고, 정신적인 것이라
서 안 보일 뿐이다.
‘이미’라는 말은, 어떤 것을 사람들의 손길, 발길, 말길, 생각길이 만나
고 스친 흔적(痕迹)을 지시한다. 바람조차도 이미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만난 바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미’를 싫어하여, 다시 재활용품을 만나는 일에 질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앉은 택시나 식당의 자리, 남
이 들이키고 내쉰 공기, 남이 건넌 돌다리, 남이 본 남산, 남과 악수한 이
성 친구, 남이 불렀던 노래 등을 만나지 않고 독야청청(獨也靑靑) 살 수 있을까?
이렇게, 한 삽 뜨고 심는 행위에도, 보이지 않는 물질적 정신적 만남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삶은 사람이나 자연과의 수많은 정신
적/물질적, 실천적/이론적, 직접적/간접적, 보이는/안 보이는, 언어적/비언
어적, 의식적/무의식적, 사실적/당위적인 만남들로 구성된다 할 것이다. 그
렇다면 만남은, 자연 속 사회적 삶의 구성벽돌인 셈이다. 이렇게 자연 속에
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
신적으로 만나고 나누지 않고서는, 개인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삶은
사회적으로만 가능하며, 그의 삶 내지 죽음의 방식도 그가 속한 사회의 ‘크
기’ 내지 ‘모습’에 좌우된다.
만남은 서로 ‘마주 나옴’, ‘나와서 마주 함’을 이른다. 만남의 분절음은 ‘ㅁ
+ㅏ+ㄴ - ㄴ+ㅏ+ㅁ’ 혹은 ‘man - nam’이다. 여기에서 비록 우연일지라도, 만
남의 두 주체(man)가 ‘마주 나와’ 서로를 향한다. 만남은 마주 나와 만나는
두 주체의 틈을 없애거나 잇기를 뜻한다. 만남은 이미 떠남의 차원을 포함
한다. 벗어나기나 떨어지기를 의미하는 ‘떠남’의 떠나다는 ‘뜨다’와 ‘나다’로
이루어진다. 따다, 떨다, 떼다, 떨어지다 등의 밑말이 되는 ‘뜨다’는, 우선, ‘떨어져 틈이 생기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떠남은 ‘떨어져 나감’을 의
미한다. 붙어 있고 이어져 있고 만나 있던 것들이 떠날 때, 사이와 거리가
만들어지고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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