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남도문화를 알릴수 있도록 용인해준 구충곤총장에게 감사드립니다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이글은 '구충곤의 남도역사문화기행'입니다. 남도문화 중에 전남 화순편으로 100여 곳을 컨텐츠화하여 자랑스러운 호남의 문화유산을 세계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 공민왕의 피란과 모후산의 유래

모후산 주변에는 물염적벽, 주암호, 유마사 등의 명소가 곳곳에 있고, 항상 맑은 계곡물이 넘쳐 관광객과 등산객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모후산은 주변의 산들에 비해 유난히 높게 솟은 출중한 산세가 일품이다. 계곡 따라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와 빽빽이 들어찬 숲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운치 있는 풍경을 자랑한다. 특히 정상 조금 못 미쳐 기암절벽 바위틈에 서 있는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은 늙은 소나무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지친 등산객을 맞이해 준다. 그 끈질긴 생명력 앞에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어본다. 천년 고송은 모후산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며 눈 아래 풍광과 경치,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세의 인심을 굽어보고 있다.
고송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산 아래서 전개된 지난 천년의 화순 역사, 그 찬연하고 장쾌한 파라노모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모후산은 아름다운 풍경을 더욱 빛내 주는 이름의 유래와 천년고찰 유마사, 수 많은 전설 등 귀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모후산의 원래 이름은 나복산(蘿蔔山)이었고 한다. 그 유래는 조계종 송광사의 창건 설화에 보인다. 보조국사가 나복산에서 나무로 만든 솔개를 날리어 떨어진 곳에 송광사라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시에, 고려 공민왕이 김도(金濤)라는 사람에게 ‘나복산인 김도장원(蘿蔔山人金濤長源)’이라는 여덟 자를 써서 내려주었는데, 나복(蘿蔔)은 동복(同福)의 별호(別號)라는 주가 붙어 있다.
모후산의 고려시대 이름이 나복산이었던 사실은 확인된다. 나복은 인삼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복은 한자로 ‘蘿蔔’ 혹은 ‘蘿葍’으로 쓰는데, 십자화과에 속한 채소인 ‘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나복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무가 아니라, 고려 인삼을 의미한다. 심마니들 사이에서도 무 꿈을 꾸게 되면 인삼 즉, 산삼을 얻는다는 설화가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날 모후산 일원에는 고려인삼의 시원지라 하여 대규모로 산양삼이 재배되고 있다. 나복산이 산삼이 많은 곳 혹은 인삼이 자라는 산에서 그 명칭이 기원한 사실과 일치된다.

화순읍에 위치한 만연산의 고려시대 이름이 백팔나한(百八羅漢)과 관련된 나한산(羅漢山)이었듯이, 모후산 역시 나복산이라는 불교 용어 혹은 불제자를 상징하는 명칭이 사용된 것이다. 나복산의 명칭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이 건국된 후 오늘날의 모후산으로 바뀌었다.
모후산의 기원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 압록강을 건너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태후를 모시고 피란 온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공민왕은 수려한 산세에 반해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여 남짓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 후 원래 명칭인 나복산에서 모후산으로 바뀌었으며,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이라는 뜻하게 되었다.
참으로 그럴싸하고 지명 변경의 정당성도 부여된 셈이다. 그러나 공민왕이 화순으로 피난을 온 적이 없으며, 홍건을 피하여 왕이 몽진한 곳은 경상도 안동 일대이었다. 공민왕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일어났던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자, 1361년 안동으로 행차하여 70일 가량 머물렀다.
공민왕이 환도한 후 안동은 ‘대도호부’로 승격되는 등 각별한 우대를 받았다. 지금도 안동에는 공민왕의 왕후였던 노국대장공주가 강을 건널 때 여성들이 인간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했던 것에서 유래한 놋다리 밟기가 전해진다. 또한 안동과 그 주변지역은 공민왕과 관련된 여러 유적과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공민왕의 동복지역 피란과 모후산 지명 유래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궁금하다. 그 비밀은 동복의 옛 지명인 ‘복주福州)’에 있다. 안동의 옛 명칭 역시 복주였는데, 우리 지역 사람들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란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문헌에 보이는 복주를 동복으로 오해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불교가 흥하였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나복산은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고, 산의 모양이나 형세를 본 따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동복의 옹성산이 거북 모양 혹은 독아지(항아리) 형상을 따라서 이름을 지었듯이, 모후산 역시 어머님의 품속과 같이 따듯하고 아늑한 형세를 따른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모후산은 모호산(母護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복현감 김성원이 늙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성모산성(聖母山城)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순절한 것을 기리는 데시 기원한다. 그리하여 나복산이 모호산(母護山)이 되었고, 마을 이름도 모호촌(母護村)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산세가 험하고 호남 내륙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모후산은 6․25전쟁의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당시 빨치산 전남도당은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유마사에 은거하면서 백아산의 산사람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당시에 파놓은 참호가 지금도 발견된다. 산막골에는 8․15광복 전까지 15호 가량 거주하였으나 모두 소각당해 폐촌이 되었다. 유마사 역시 빨치산의 근거지라고 하여 모두 불태워졌으나 근래에 이르러 복원 정비되고 있다. 자랑스러운 남도문화문화를 알릴수 있도록 용인해준 구충곤총장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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