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하는’ 개인 미디어가 고사하고 있다. 팟캐스트, 블로그, SNS 등을 이용한 개인 미디어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제도권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 미디어가 발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진실의 한 면만 본 것이다. 언론의 현장 취재와 사실 전달까지 대체할 만한 취재형 개인 미디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거나 이미 현장을 떠났다.
‘취재하는 1인 미디어’의 대표주자 ‘미디어몽구’ 김정환씨(36·현 뉴스타파 제작팀)는 “버티고 살 정도는 된다”고 말했다. 축구를 좋아하던 김씨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시사블로거가 됐다. 2005년 말 황우석 박사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에 모여든 기자들과 경찰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의 첫 ‘기사’였다.
10월 3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현장에서 만난 김씨는 “예나 지금이나 나처럼 전업으로 시사블로거 활동을 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제2의 미디어몽구가 왜 안 나오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일단 현실적으로 돈이 안 된다”고 말했다.

“버티고 살 정도면 괜찮다”는 김정환씨는 지난 9월 펴낸 자신의 책 <미디어몽구, 사람을 향하다>를 많이 구입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생계 때문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내가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세를 받으면 전액 위안부 할머니들께 전달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용산참사를 다룬 독립영화 ‘두개의 문’에 영상을 제공한 사자후TV는 올해 6월 방송을 마지막으로 아예 문을 닫았다. 사자후TV는 2008년 9월 촛불시위 당시 서울 조계사에서 벌어진 회칼 테러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시민 인터넷방송이었다.
3~4명의 팀으로 이뤄진 사자후TV 팀원들은 용산참사뿐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강제철거, MBC 파업현장 등을 영상으로 찍었다. 이들이 찍은 영상은 아프리카TV, 곰TV 등 영상 플랫폼을 통해 방송됐다.
사자후TV 리포터를 했던 최수정씨(26)는 대학 휴학 중에 사자후TV를 시작했다. 최씨는 “회칼 테러를 보고 욱하는 마음에 조금씩 돈을 모아 시작했다. 처음엔 노트북, 캠코더만 있으면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최씨는 “영상 취재를 계속하고픈 팀원들의 마음은 여전하지만, 전처럼 현장 방송을 유지할 수 있는 금전적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곰TV 등이 하나둘씩 시사방송 노출 빈도를 줄이면서 후원금이 줄었다. 노동조합으로부터 일정 금액을 받고 노조활동을 촬영하는 등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활동가인 나비씨(29·예명)는 “1980년대부터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파업현장 등을 기록하고, 그것을 엮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숲속홍길동’이란 예명을 사용하던 영상활동가 이상현씨가 생활고 끝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2009년에는 3년 이상 기륭전자 투쟁을 영상기록해 오던 김천석씨가 숨졌다.
영상활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은 이들의 죽음을 계기로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라는 정책간담회를 올해 2월 열었다. 현장 영상활동가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나비씨는 “그동안 현장 영상 촬영도 노동의 일종이라는 의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집회에 참석한 노동단체, 시민단체에게 돈을 주지 않듯, 영상 촬영도 ‘활동’의 일종으로 보고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는 말이다.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라는 정책간담회에서 유흥희 기륭전자 노조 분회장은 “김천석 동지가 죽은 뒤에야 영상이 자판기에서 물건 뽑듯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비씨는 “집회가 있으면 가서 중계하는 식의 현장 영상이 많았는데 그보다는 기획된 영상이 의미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계획을 세워서 영상을 만들지, 현장 영상활동가들 노동의 대가는 어떻게 지불할 것인지 구체적인 체계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미디어몽구와 함께 대표적인 1인 미디어인 최병성 목사(49)는 생활고만 문제가 아니라 시사블로거, 현장 영상활동가들의 활동을 알릴 공간이 많이 축소된 점도 지적했다.
그는 시사블로거들이 활동할 수 있던 대표적인 공간으로 다음 블로그를 꼽았다. 최 목사와 김정환씨는 모두 이곳에서 시작했다. 최 목사는 “2008년 촛불시위 등 시사 쟁점이 인기를 끌 때, 미디어다음은 직접 기자단을 운영하면서 적극적으로 시사블로그를 띄웠다. 그런데 김철균 다음 부사장이 청와대 뉴미디어홍보비서관으로 들어간 이후 다음 기자단도 없어졌고, 시사문제가 미디어다음에 오르는 일도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최 목사는 기업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시사블로거들에게 ‘작업’을 들어간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2006년 강원도 영월에서 쓰레기를 태워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 실태를 고발하면서 시사블로그를 시작한 최 목사는 2008년 초, 동료 시사블로거에게서 거짓 기사를 쓴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알고보니 공장 측에서 해명하겠다며 블로거 몇 명을 모아 공장 견학을 시켜줬더라. 그리고 난 뒤 시멘트 공장이 사실은 안전했다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그는 “칼럼을 쓰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취재를 통해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를 쓰면 작게나마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 목사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경제적 문제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익재단이 생겨 이런 젊은이들을 지원하면, 일자리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닌가”라고 말했다.
영상활동가 나비씨도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에는 공공기금이 지원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영화진흥기금이 포괄하지 못하는 현장 영상에 대한 공적인 기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