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중요한 것은 76세 할머니가 글을 썼다는 것이고. 자기 글을 표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내용은 76세 김할머니가 직접 쓴 지난 인생이야기를 편집없이 담아 논 글입니다.
"저는 요 예전에 여군 운전병 이었어요, 사회에 나와서 택시도 25년간 운전을 했고요, 지금은 단 지난 인생이지만"


이제는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거나 인터넷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할머니의 일과가 됐다. 김 할머니는 “여군 시절과 택시 운전사였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나 싶어. 외롭고 미칠 것 같을 때도 많고 죽고 싶을 때도 있어” 하고 탄식했다. 딸처럼 찾아온 우체국 여직원 차갑게 파고드는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여전히 삶을 이어오게 된 데에는 한 우체국 직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부천우체국 우편물류과 소포실장을 맡고 있는 김실장님이다 그 주인공 김 실장은 마치 딸처럼 김 할머니를 곁에서 보살피고 있다.김할먼니도 너무나 사랑했고 김할머니가 나은딸처럼의지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할머니 집을 방문한다. 평일에는 시간 나는 대로 잠깐 들르고, 토요일에는 할머니와 시장에서 요리 재료를 사 와서 같이 저녁을 해 먹기도 한다. 명절마다, 친정과 시댁에 방문하는 것과 별도로, 할머니의 임대아파트에 들러 인사를 하곤 한다.
또, 김 할머니와 자신의 가족 및 친척을 서로 소개하여 친구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지금은 80세인 김 실장의 친정어머니와 김 할머니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고 한다. 김 실장은 “광주에 계신 어머니와 의자매를 맺어 형님 동생 하시면서 광주에서 부천으로, 부천에서 광주로 서로 오가며 자장면도 시켜 드신다”고 했다. 또한 할머니가 병이 나면 남편과 아들 딸을 데리고 할머니를 문병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과도 친한 관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떨어져 있을 때에는 전화 통화로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김 실장은 “급하게 전할 일이 있으면 내게 전화 또는 문자를 보내고,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인터넷 메일을 보내신다”며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의논해서 해결하고, 내가 바쁠 때에는 도움이요청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조언이 큰 역할 할머니와 김 실장이 처음 만난 곳은 2006년 2월 부천시 소재 모복지관에서 모우체국 사랑의 봉사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지전문대학 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 학점은행제의 학위과정 복지실천 실습에서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김 실장은 처음 현장에서 독거노인을 맞닥뜨린 풋내기 학생이었고, 할머니는 우울증에 극도로 시달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가족을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실장은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가족과 친척들을 소개하여 친구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고 말한다. 김 실장은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우울증이 심하고 많이 아팠지만,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를 통해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기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이 지속적으로 김 할머니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친정어머니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 광주에 살고 있는 김 실장의 친정어머니는 부랑자와 독거노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김 실장은 “80세의 노구에도 호스피스 봉사를 하시는 어머니가 항상 김 할머니를 잘 보살펴 드리라고 말씀하곤 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업무가 직접 부천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케팅을 하는 업무이다 보니 할머니에게 많은 보살핌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처음 마음먹은 대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명절일수록 독거노인에 관심 가져야” 김할머니와 김 실장이 각별한 사이가 된 데에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남성 주류의 직업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그것이다. 여군을 나와 영업용택시운전사와 버스 운전을 했던 할머니의 경험과, 남성이 대다수인 우정 공직에서 자리를 잡아온 김 실장의 면모에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김 실장은 “여군 출신인 할머니가 멋진 젊은 시절을 말씀하시면 나도 감동을 받는다. 나도 여고 졸업 후에 여군에 가려고 시험을 본 적이 있어 할머니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김 할머니에 대해 “지혜롭게 사시면서 지병인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신다.
다른 병마도 겪고 있는데, 이와 싸우면서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이라며 “할머니께서 항상 행복하게 사시면 좋겠다. 항상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해 그게 걱정이다. 그래도 삶의 의지가 강한 분이라 지금처럼 힘차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복지 혜택이 여러 독거노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테면, 수요자와 후원자·사업자를 연계시켜 복지 혜택이 곳곳에 스며들도록 하는 일이 그것이다. 특히, 지자체와 보건복지가족부에만 설치돼 있는 사회복지과가 정부 부처 기관마다 신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올 추석에는 경기침체로 독거노인을 위해 복지관에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독거노인들은 더욱 어려워진다”며 “명절일수록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씨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전했다.
너무나 외롭고 의지 할때없는 몸이라서 정말 눈물로 세월을 보냈었다고 해도 과원이 아니다 우리 김 과장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자 정말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찌 장 단점이 없으리오 사람은 단점을 보지말고 장점을 보라고 성현말씀에 덧 붓쳤다 아름다운 용서를 바라면서 柏希 할메 글 내 딸을 찾아 주세요 그리고 처음 김실장을 보았을때 너무나 의젖하게 생겼고 정말 따뜻하게 생겼었다 나는 내 생전 처음으로 김실장한테 어리광도 부리고 전화를 걸어서 음성이라도 들어야만 나는 맘을 놓고 했었다 참 그 수많은 세월 나는 지금 세월따라 나이가 더 먹었고 더 늙고 보니 하루라도 외로워서 못 살겠다 나에게 이렇게 정들어 놓고 나를 버린것이다 나는 모루겠다 이 세상이 싫다 믿지 못할 사람들 나는 너무나 진실하게 살아 왔다 이렇게 세상사리가 무심 하단 말인가?이렇게 나를 돕겠다고 인연을 맺어서 정들어 놓고 지금은 나를 버렸다 아마 가족들도 실허하고 다 버린것 같다 나는 정말 내 가족으로 생각을 하고 내 삶을 의지 하면서 살아 볼려고 했것만 나는 방안에서 새한마리가 되여 꼼짝않고 들어 않자서 컴퓨터만 하고 글만 쓴다 그렇지만 사람은 한계가 있다 이제는 내나이가76살 정말이지 더 이상 이 사회를 못 따라 가겠다 나도 멍청이가 아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딸 착한 김실장이 진급되기를 염원하면서 어떤일이 있어도 한 점수라도 따라고 글도 쓸줄 모루는 내가 KTV에서 수기를 모집한다는 자막 글귀를 읽었다.
그 글을 보고 용기를 내서 나는 내 인생이 살아온 수기를 썼다 작가 선생님께서 내 글을 보고 나한테 전화가 왔고 PD가 와서 찰영해 가고 며칠후 TV이에 반응이 되였다 우리는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사랑에 모녀라고 나 죽을때 까지 나를 지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말이 지금에 와서는 거짓이였다 나는 더 가슴이 찢어지고 매일 보고싶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정말 사람은 믿을것이 못된다고 하드니만 설마 그렇게 변할줄이야 정말 몰랐다 물론 내가 어리석고 잘 못을 저질렸겠지 하고 지금에 와서는 반성을 하면서 용서 만을 빕니다 여러분 우리 김과장님이 저한테 되 돌아 오도록 기도 많이 해주세요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고생도 많이 하면서 살아 온사랍입니다.
오직 나홀로 인생 어느누구가 택시운전을 마치고 회사에 입금을 시키고 집에와서 문을따고 들어와도 누가 이제 오냔말 한마디 해 주는 사람없이 그렇게 외롭게 살아와서 우리 과장을 더 좋아 했는지 모룬다 나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렇게 의젓하고 그렇게 든든할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리광도 부리면서 전화 걸면서 너무나 고마워서 너무나 행복해서 울기도 하고 했다 참 너무나 내생명 처럼 의지를 했는데 보고 싶어 했는데 나이먹고 늙었다고 버리는지 그 맘 속을 누가 알것인가 하늘이 무심치 않을것이다 지성이면 하늘도 우러러 본다고 했거늘 나는 너무나 착하게 살아 왔다 왜 나를 버렸을까? 사람이란 단점도 있고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점을 보고 사람을 대하라고 했거늘 사람따라 그 사람환경이 달라 지는법 조금만 이혜해 주면 될것인데 또 한번 인생의 삶에 있어 큰 스승을 얻었다 그러나 가슴에 상처는 너무나 크다 /작성자 걸래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