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화장품
조옥성
잔서리가 내리는 11월 초겨울 동이 틀 무렵, 여느 때와는 달리 잠자리 머리맡에서 무엇인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나는 언뜻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두 분께서는 사소한 집안일로 싸움이 잦기는 했지만, 나는 또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다툼인가 했는데, 이번에는 두 분이 아닌 세 분이 앉아 옥신각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어젯밤의 술이 아직도 덜 깬 듯한 목소리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술에 곤드레가 되어 해가 돋도록 늦잠을 주무시던 아버지까지 끼여 있는 것을 보니 예삿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철없는 가운데 이런저런 집안일에 관심이 많았다. 잠자리에 누운 채 나는 귀를 세우고 세 분의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만 있었는데 토의의 내용인즉,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이 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여수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 집 형편으로서는 대식구가 이 섬을 버리고 육지로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토의는 심각했지만, 나는 내심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친구들은 방학 때 육지에 구경 갔다가 돌아오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신이 났지만, 나는 얼마 안 되는 뱃삯이 없어 가지를 못하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입만 쳐다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이제 꿈이 아닌 현실로 옮겨질 토의가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고집이 세고 말이 많으시던 아버지도 그날만은 묵묵히 듣고만 계시더니 한참 뒤에야 비장한 어조로 “여수로 이사 가면 우리는 다 굶어 죽는디….” 하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할머니도 당치 않는 말이라며 담뱃대만 쪽쪽 빠시면서 ‘냄바라’를 외치고 계셨다.
이 섬에서 60여 년 삶의 터를 잡고 살아온 할머니는 목숨 같은 내 고향 땅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고 우겼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 설득을 계속한 끝에 할머니와 아버지의 승낙을 얻게 되었다.
어머니는 비록 야학 공부로 한글은 터득했지만,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토록 고집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어머니에게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였지만, 손주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할머니는 성격이 호탕해서 일상의 대화 도중에도 너털웃음을 웃으며 한쪽 엉덩이를 살짝 들어 방귀를 뀌고는 염치가 없는지 ‘냄바라’를 외치곤 하다 보니 할머니의 별명이 ‘냄바라(내 좀 봐라)’할머니로 통해 온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호탕한 할머니였는데, 그날은 몹시 조용하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여수 이사 문제는 신속하게 진행이 되었다. 아버지는 곧장 여수 바닷가 봉산동에 있는 전셋집을 계약하였다. 아버지는 술은 좋아하셨지만, 동네의 이런저런 일을 맡아보는 ‘동네서기’로 오랫동안 일을 해 왔기에 서류작성과 아이들 전학 문제 등 행정 업무는 빈틈없이 척척 해내는 분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본적도 여수시로 감쪽같이 바뀌어 섬놈이 아닌, 의젓한 도시의 소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나는 매사에 적극적인 어머니 덕분에 교과서 그림에서만 보던, 높은 빌딩이며 자동차를 여수에 와서 처음 봤다. 모든 것이 신기해서 별천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사 온 첫날밤에는 온돌방 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새어 올라와 질식하여 죽을 뻔한 일로 도시생활에서의 맵고 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온갖 잡일과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시면서 칠남매의 자식들이 꼭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밤낮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일흔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봄 들자 집안의 대청소를 하며 어머니의 장롱 속을 정리하다가 오래 된 저고리 속에서 굴러 떨어져 나온 것은 물기 없이 바싹 마른 ‘동동구리무’통이었다. 밤낮없이 자식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일한 화장품이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며 콧등이 시큰했다.
5월은 어버이날이 들어 있는 달이다.어머니가 돌아 가신지가 17년이 되었다. 산소에 찾아가 술 한 잔에 소박한 꽃 한 송이 올려 편안히 잠드시기를 기도할 것이다.

<수필가 소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행코문학회 수필가로 등단한 조옥성 박사는 협회 산하기관인 한국강사총연합회 대표회장, 전남권 행코교수단 회장으로서 행복한 세상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유튜브 '조옥성tv'와 '남해안신문'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여수시체육회 사무총장 출신으로서 현재 여수시의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