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자詩] 몽당연필
[임명자詩] 몽당연필
  • 윤일선
  • 승인 2015.10.16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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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낙타, 임명자 시인 '몽당연필'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윤일선 ] 


몽당연필
-임명자-

가슴 속 오천 권의 문자로 든 붓
몽당붓이 일 천 자루였다*는 글 앞에

한 자루도 몽당연필로 만들지 못했다는
어느 시인의 고해성사

연필 깎는 연습도 미처 못 하고
세상밖에 내놓았던 염치없는 문장들

지하 환풍구 앞 속절없이 드러난 속살처럼
가난한 가슴은 사색이 되었다.

책장의 수많은 문자는
무심했던 시간만큼 두꺼운 먼지에 눌리고.

연필꽂이에 갇혀 세상구경 못 한
수십 개 눈총에도 무디기만 했던 지난 시간

모든 생명 앞에 겸손했느냐
더 겸손하여라**

한 권의 문자보다 더 큰 스승님 말씀
속죄하듯 기도하듯 가슴에 담는다.


*추사 김정희 어록에서 인용
**허형만, 「가벼운 빗방울」 작가세계, 2015

임명자 시인: 2005년 『문학예술』 등단. 국제 펜 회원으로 활동.

詩評 -시인 강대선-

얼마나 많은 글을 읽고 써야 제대로 된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윤오영 수필가는 그의 양잠설(養蠶說)에서 누에가 고치가 되는 과정을 글쓰기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누에의 식욕이 왕성하였다가 감퇴되는 시기를 최안기(催眼期)라고 명명하고 이를 사색에 잠기는 시기라 고 하였다.

이후 누에가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자다가 얼마 후에 탈피하는 시기를 인생을 탐구하는 시기로 비유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반항과 고민과 기피로 몸부림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누에가 다시 고개를 드는 기잠(起蠶)은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하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누에가 최안, 탈피, 기잠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듯 글을 쓰는 일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성숙된다고 하였다.시인 또한 자신의 언어를 부단히 삭이고 새롭게 탈피해가는 과정에 선 사람들이다.
시인은 “몽당붓이 일천 자루였다”는 글 앞에서, “한 자루도 몽당연필로 만들지 못했다”는 어느 시인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시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고개 숙임은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찰이자 사색의 과정인 것이다. 시인은 묻는다. 나는 이처럼 치열하게 글과 싸워본 적이 있는가. “세상밖에 내놓았던 염치없는 문장들”로 자신의 내적인 힘이 허약해져 있는 단계로 들어선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자신의 언어를 다시 돌아본다. “두꺼운 먼지에 눌리고”, “무디기만 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언어에 대한 절망으로 부끄러워하며 반항과 고민과 기피로 몸부림치다가 시인은 스승의 죽장으로 한 대 얻어맞는다. “모든 생명 앞에 겸손 했느냐//더 겸손하여라” 탈피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고개를 드는 기잠(起蠶)의 시기이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몽당붓 천 자루 갖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모든 생명에 대해 겸손한 자세라는 스승님의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다시 뽕잎을 먹기 시작한다. 한 단계 성숙한 것이다.

시란 자신의 감정을 나열하는 것도 아니요. 허명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인은 몽당붓 천 자루도 더욱 겸손한 자세로 낮아지는 과정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시를 쓰는 일은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속죄하듯 기도하듯” 나와 이웃에게 더욱 낮아지고 다가서는 끊임없는 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시인은 “가난한 가슴”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가난이 부럽다. 이 가난한 가슴을 통해 누에가 고치를 짓듯 시인은 자신의 문장으로 성가(成家)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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