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이다. 숨어 있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⓵. 수의도 입지 못한 시신들, 참담한 광주5·18
▶원 할아버지는 5·18 민중 항쟁 시절 시신 수습을 했다던데 얼마나 많은 시신을 수습했는가?
▼원 할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나는 1961년부터 광주지역 교회 신도 등을 대상으로 이 일(장의사)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518 광주항쟁 때 죽은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너무 참담하더라고.” 하면서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는 듯했다.
이어서 원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시신들이 수의도 갈아입지 못하고 피 묻은 옷 그대로 송판 관에 담아지는 시신은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네. 광주 5·18사태는 지구상에 없을 일이 일어났어. 죽은 사람은 향 물로 씻고 수의로 갈아입히는 것이 장례인데 그때 그 시신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 너무 참담했어.” 하고 그때를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 할아버지는 1980년 5월 19일부터 1주일 동안 광주공원 광주 기독교 병원 전대병원 응급실에서 5·18 희생자 시신 50여 구를 입관해서 영혼의 세계로 안내 영민하게 했던 장의사요, 참담한 역사의 현장을 눈물의 잉크로 뜨거운 가슴에 기록한 역사의 증인이다.
▼원 할아버지는 “입관한 시신들의 수의를 갈아입히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젖가슴이 찢어졌거나 엄마와 함께 죽은 세 살짜리 아이. 광주공원 긴 계단으로 질질 끌려 내려오던 시신들을 생각할 때 금수세계에서나 있을 잔인함과 참담함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이상의 5·18 비극은 기사로 나간 사실이 있다고 말한다)
⓶. 오남택 정보과장이 300여 명 생명 살렸다.
▶ 원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5·18 비화가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비화는?
▼원 할아버지는 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는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야제.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아니야. 역사를 바로 배워야 반복하지 않제 이. 그라는가?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밝히고 당사자가 살아있을 때 밝혀야 확인될 수 있으므로 숨은 역사를 밝히고자 사직동 마을기자학교에 입학했어. 꼭 이 역사는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기에 말이여. 이제는 말 할 수 있어. 그때 300여 명의 학생시민군을 살린 공로자는 오남택 광주 경찰서 정보과장 이어.”라고 말했다.

이어서 원 할아버지는 “그 당시 1980년 5월 20일경 공중 헬기에서 방송이 흘러나왔어. 내용은 말이여, 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은 오후에는 발포한다고 외출금지명령 방송을 했어. 나는 당시 서현 교회 집사로 우리 처와 함께 서현 교회에 은신하고 있던 학생시민군 300여 명의 식사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어. 300여 명의 학생시민군을 식사담당을 하려니까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광주경찰서 조정민 여경이 사복 차림으로 찾아왔어. 우리는 서로 금방 알 수가 있었제.”하고 당시의 긴박함을 눈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나는 서현 교회 집사였고 조정민 여경도 서현 교회 집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금방 알아보는 사인데, 조정민 사복 여경이 하는 말이 『서현 교회에 집결한 데모대가 어젯밤에 군인 차를 소각시켜버리고 미국으로 연락하는 무전기를 탈취해 갔소. 큰일이요 큰 일.』 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조정민 사복 여경은 『원 집사가 데모주동자를 설득시켜 내일 새벽까지 무전기를 돌려주지 않으면 내일 새벽 3시에 군경합동으로 서현 교회를 습격할 것이오. 원 집사는 서현 교회에 있는 데모 학생과 교회에 대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대모 주동자를 설득시켜 무전기를 반납할 수 있게 해주세요. 반납하지 않으면 서현 교회에서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뻔하지 않소? 내일 새벽에 무전기를 적십자병원 후문에서 꼭 인계해야 합니다.』 라고 말해서, 원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고 사복 여경은 돌아갔다.
원 할아버지는 “나는 참으로 무거운 짐을 졌다고 생각하고 즉각 학생시민군 대표를 만나서 설득했다.”고 말했다. 학생시민군 대표에게 “우리는 지금 무전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군경합동 습격으로 많은 학생시민군과 서현 교회가 희생하게 된다. 무전기를 반납하는 길이 학생시민군을 구하는 대승적 결단이자, 행동이다.”고 설명한 결과 “학생시민군 대표자는 수긍하고 은닉장소에서 무전기를 나에게 가져다주었다.”고 말했다.

▣ 원 할아버지는 무릎을 걷어 올리며 철조망 곤봉에 맞아서 무릎에 상처가 있다고 보여주었다.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상처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김이운 학생은 팔이 병신이 되어 5·18 희생자로 접수되어 보상을 받고 있으며 원 할아버지는 2015년에 신고를 했단다.
▼원 할아버지는 “그 당시 서현교회는 300여 명의 학생시민군이 은신하고 있었당께. 나와 내 처는 주먹밥을 제공하는 식사담당이었어. 우리 집사람도 그때 당시 다쳐서 5·18유공자로 신청했어.”라고 했다.
⓸. 리더의 폭넓은 정보력과 발 빠른 판단력
이어서 원 할아버지는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서현 교회에 은신했던 학생시민군에게 평화롭게 평정된 것은 광주경찰서 정보과 오남택 과장이 원도희 집사와 조정민 여경이 서현 교회 집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오 과장은 조정민 여경에게 나(원도희 집사)를 찾아가서 무전기탈취에 관한 사실과 무전기로 인한 앞으로의 학생들의 피해를 나에게 설명하게 한 것이다. 상호 정보소통이 되면 원 집사는 학생시민군 대표를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한 오남택 과장은 무전기탈취로 귀중한 생명과 재산이 무전기에 담보되어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준 결과 무전기를 반납했기 때문에 귀중한 학생들의 생명과 서현 교회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오남택 과장이 그 후 승승장구해서 여러 시군의 경찰서장을 역임하고 퇴직해서 남구 어디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증인이 살아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사실이고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이나 당시 오남택 과장을 만난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원 할아버지는 “오남택 과장이 경찰 퇴직자 경우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우리 동생이 경찰직에 있다가 암으로 사망했는데 장례식장에 왔었다. 그래서 동생 장례식장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이 이야기는 처음 밝힌다.)
▣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살아있는 역사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주머니에 있는 송곳처럼 언젠가는 주머니를 뚫고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쁜 역사를 반복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배워서 잊지 않아야 한다. 원도희 할아버지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비화를 공개해야겠다는 판단과 자신감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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