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518비화(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18비화(1)
  • 신문식 기자회원
  • 승인 2015.10.0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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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나눔의 봉사의 실천가 사직동의 원도희
▲ 보훈 기독장의사 원도희 사장.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신문식 기자회원 ] 
1. 원도희는 어떤 사람인가?
▣ 가슴속에 품고 있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기록해야 역사다. 그래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5·18의 비화를 역사로 남기기 위해서 자원해서 사직동 마을기자 학교를 신청했다는 79세의 건장한 할아버지가 있다.

79세의 원두희 할아버지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시민기자에게 가슴 속에 묻어 둔 비화를 털어놓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약속 장소는 동구 학동 남광주 시장 광주천변에 『보훈 기독장의사』라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살고 계신 곳은 사직동이고 장의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었다. 나는 의외 직업이고, 장의사 점포라는 것 때문에 깜짝 놀랐다.

좁은 공간에 마을 분들이 3명이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이 좁은 공간에 17시가 되면 손님들로 꽉 메우는 사랑방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은 주인의 덕이 많아서 좋은 곳이며, 사람이 바로 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좋은 곳이다.

▶나는 원 할아버지께서 당황하면 할 말도 다하지 못할까 봐서 차분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고향과 가족관계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성격이 급한 듯 매우 빨리 얘기를 하려고 했다. 아니 나이 탓인지 숨이 가빠서인지 조급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건강한 체력과 활동으로 봐서 나이 탓은 아닌 것 같았다. 성격 탓인 것 같았다.

▼원 할아버지는 “내 고향은 나주 영산포여. 나주 영산포 구진포에서 가장 큰 장어집이 우리 조카 집이네. 내 이야기 하면 잘해줄 것이여. 내 조카 집이여”라고 자랑하면서 “허허허”하고 웃었다.

이어서 원 할아버지는 “나는 형제가 7남 맨 디 4남 3녀 중에 큰아들이여. 내 밑으로 형제가 많아서 젖을 많이 못 먹은 탓인지 키가 작아서 생애에 가장 큰 곤욕을 지른 일이 있어. 내 자식은 1남 4녀로 자식들이 다 잘되었어. 아주 잘 살아. 큰놈은 광주 모 보험회사 높은 사람이고, 딸은 중국에서 잘 살아” 하며, 자식들이 사회적 기반이 튼튼하다고 싱글벙글 자랑했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이 잘되어 사회에서 반듯하게 활동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자식은 사회활동에 입지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을 원 할아버지를 통해서 알 수가 있었다.
 

▲ 원고를 검토확인하는 원도희 할아버지.

⓵ 극빈자들을 위해서 장의사를 선택했다.

▶원 할아버지는 배움도 많으시고 지역사회활동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원하지 않는 장의사가 된 동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원 할아버지는 서슴없이 “나는 극빈자를 위해서 장의사가 되었네. 영광에서 간첩 작전할 때 경찰이 간접을 잡다가 부상을 했는데 갑자기 경찰 아버지께서 별세하게 되었어. 그때 경찰 부친의 초상을 치르는 것을 봤는데 장의사 측에서 수의 등 각종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장례를 마친 후에 계산하는 것을 봤는데 너무나 많은 폭리를 취하는 것을 목격했어. 가난한 사람은 장례도 어렵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빈자들을 위해서 장례사가 되어야겠다고 작심을 했어”라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나는 육군 제1 야전병원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앰브렌스로 시체를 운송하면서 어느 정도 시신 관리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 그러다가 영광 간첩작전 중 경찰 부친상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더라고. 누가 이런 일을 얼마나 직업으로 하겠어? 그러나 생활이 가난한 극빈자들이 너무 걱정되더라고, 그래서 장의사를 선택했제.”라고 자신감 있게 이야기를 털어놨다.

▣ 원 할아버지는 광주 동구 학동 남광주시장 내에서 『보훈 기독장의사』를 경영하고 있다

원 할아버지는 장예사를 경영하면서 지금까지 극빈자(생활보장 대상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장례 물품(수의. 관) 등을 무상으로 공급해주고 있어. 앞으로도 많은 극빈자에게 무상공급을 할 것이다.”고 말하면서 전화번호(062-224-1024)를 가르쳐 주었다.


⓶. 체격이 왜소해 태권도 고수가 되다.

▶태권도의 고단자 고수라고 들었는데요?
▼ 원 할아버지는 “영산포에서 광주로 학교에 다니려면 통학열차를 타고 다녔지. 목포에서 광주로 학생들이 열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통학열차여. 나는 신체가 작지 않은가?. 키가 작으니까 무시당하고 맞고 돈을 빼앗겼어. 돈이 없으면 매일 얻어터지는 것이 일 수였어. 통학의 길이 너무 고통스러웠어. 항상 주머니에 돈을 갖고 있어야 구타당하지 안 했어. 돈을 주면 안 때렸으니까” 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창문 밖을 멍하니 응시하였다.

▣ 지금 같으면 학교 폭력이었다. 그 시절은 그런 깡패들이 교모를 눌러쓰고 몸에 딱 달라붙은 『뽀삐』 바지나 펑펑한 『나팔』바지를 입고 바짓가랑이를 땅에 질질 끌며 통학열차를 누빈 때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학부모들의 성화는 없었다. 성장기에는 그렇게 서로 부딪기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 키가 작은 것으로 많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서 피하거나 이사하거나 광주에서 자취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인데?

▼ 원 할아버지는 “그때 나는 키가 작아서 맞았지만 피하거나 자취를 할 생각보다 태권도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때 태수도가 한국에 처음 개관했는데 얼마나 마음에 한이 맺었으면 유단자까지 승급하고 군대에 갔겠어. 태권도를 배우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어깨와 가슴도 활짝 펴고 다녔당께.
원 할아버지는 “나는 태권도를 배워서 유단자로 군에 입대했어. 군대에서 태권도 사범 했어.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 태권도를 열심히 연마했어. 그리고 1960년도에 제대를 했당께. 제대할 때 5단까지 승급을 했으니 태권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지. 전남 오도관 부관장까지 했으니 말이여. 당시 전국 관장은 장태익 보안대장, 태권도 한국 총재는 최홍희씨가 했어”라고 하면서 만면에 환한 미소와 화색이 돌았다.

▣ 79세의 원 할아버지는 이야기하는 동안에 지친 기색도 전혀 없었다. 제대하고 나서 태권도 오도관 전남 부관장이 되어서 심사하러 다니고 전라도를 휩쓸고 다니면서 지역 활동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⓷. 사직동의 봉사자 원도희

▶ 지역 활동은 언제부터 했는지?
▼원 할아버지는 말 기운이 초롱초롱하면서 “나는 사직동 8통장과 민방위대장을 했으며, 새마을 지도자. 사직동 정화위원활동을 했다. 사직동 8통장은 1975년부터 1982년까지 8년을 했으며 새마을 지도자를 10년 정도 했다. 서울과 수원에서 교육을 받는 등 열성적으로 지역 활동을 했어. 누가 서울 수원까지 가서 교육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간디?” 하며, 자신은 무엇이나 한다면 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지역 활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원 할아버지는 정화위원에 대해서 “지역 정화위원은 사회의 폐습이나 부조리 나쁜 관습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계도역할을 하는 사실 관변단체여. 특히 학교 주변의 나쁜 폐습을 없애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어. 학교 학생들이 폐습에 젖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바르게 자라야 미래사회가 바른 사회가 되지 않겠어?” 하면서 정화위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원 할아버지는 “나는 사직동에서 정화위원뿐만 아니라, 사직동 새마을 금고 부이사장도 했어. 젊었을 때 지역 활동을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했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줬지”라고 했다.

원 할아버지는 “내가 서현 교회 연합회장을 했는데 회장을 하는 동안에 연합회 예산이 많이 확보되었어. 그래서 마치 서현 교회 창립 104주년에 남구의 각 동에 구호미로 극빈자들에게 나눠주라고 104포의 쌀을 기증했어. 백운1동. 백운2동. 서1동. 서2동. 양림동에 각 20포씩 보급했는데 어느 동에 4포를 더 보급해서 104포가 되었제. 서현 교회 104주년을 기념하려고 104포를 기증하게 된 것이여. 극빈자들을 주라고. 내 마음속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 하며, 사랑과 배려 나눔 봉사가 몸에 밴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다.

⓸. 사직동 55년을 지킨 산 토주 대감

▶ 그럼 영산포에서 사직동으로 이사 온 지는?
▼원 할아버지는 “1960년도 3월에 육군 만기 제대를 하고 8월에 결혼을 했으며, 10월에 사직동으로 이사 왔어.”라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내가 왜 이렇게 빨리 서둘렀는가 하면 제대를 하고 원호가족이라 원호 청에 접수를 했더니 시청에 직장이 준비되었어. 그래서 매우 급하게 서둘러서 사직동으로 이사하게 되어 지금까지 55년 동안 사직동을 떠나지 못하고 사직동이 좋아서 사직동에 살고 있어. 허허허”하며 활짝 웃었다.

▣ 원 할아버지는 사직동이 좋아서 사직동에 살다 보니 55년의 세월이 되었다고 한다. 애향심이 강한 사람들은 고향을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지만, 요즘 세상은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개발지역으로 철새처럼 날아다니는 황금철새가 많다. 그래서 우리 마을 우리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다. 요즘 정부에서는 신자유주의 물결의 폐해를 인식하고 마을공동체. 국가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리고 있다.

⓹. 대학원까지 수학한 엘리트 활동가

▶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활동으로 보아 훌륭한 활동을 하셨는데 학교는? 하고 물었다.
▼ 원 할아버지는 여기서 목에 힘을 주는 듯 “나는 연세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네.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부친께서 6·25 때 소령으로 전사했기 때문에 원호가족으로 살아왔어. 정부에서 장학금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네.”라고 부친 덕에 정부지원을 받아서 대학원까지 나온 엘리트 장의사라고 자랑했다.

또, 원 할아버지는 “광주 숭일고등학교 서무과에 근무할 때 광주 신학대학교 야간대학을 다녔는데, 1학년 때에 학생회장을 했네. 유례없는 1학년 학생회장을 한 것이여. 1학년이 학생회장을 맡은 것은 나 말고는 전에도 없고 나 이후에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원 할아버지는 원호가족으로 시청에서 근무하다가 공직자의 월급이 적어서 숭일고등학교 서무과에 근무하게 된다. 숭일고등학교 서무과에 8년간 근무하면서 신학대학교 야간대학을 졸업했으며 그 후 직장(숭일고등학교)을 그만두고 연세대학교를 입학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한 엘리트 지역사회활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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