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석 칼럼] 남우충수
[홍경석 칼럼] 남우충수
  • 홍경석
  • 승인 2023.02.0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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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2월 8일 자 C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歷史>가 실렸다. [“동학 농민 진압해달라”...고종, 철수하려는 일본군 붙잡았다]라는 글을 보면 기가 막힌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종(高宗·재위 1864~1907)의 시대는 지구 동쪽과 서쪽이 서로 고립돼 있던 지난 시대와 달랐다. 전 지구에 관한 정보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유입 중이었다.

또한 고종은 백성에게는 모진 지도자였다. 그러면서도 세계에는 무지했다. 국가 경영 또한 무능력했다.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보여준 모습은 처가 여흥 민 씨 세력과 연합한 이기적인 권력가였다.

20세기를 6년 앞둔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고종·민 씨 척족 연합 정권 탐학이 낳은 사건이었다. 1893년 어전회의에서 “민란은 외국군을 불러서 진압하자”고 제안했던 고종은 격렬한 관료들 저항에 부딪혀 이를 철회했다. 이듬해 동학이 터졌다.

고종은 여흥 민 씨 영준(민영휘)과 함께 청나라 군사를 불렀다. 동학 전쟁이 터진 와중에 고종이 믿는 무력은 청군과 조선관군이었다. 그런데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 친위대를 무장해제했다.

일본에 의해 들어선 갑오개혁정부는 곧바로 ‘의안(議案)’이라 불리는 각종 개혁안 200여 개를 공포하고 근대 개혁작업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그해 10월 초 동학군이 재봉기했다.

일본과 손잡은 조선의 개혁 정부는 동학 진압을 원했다. 일본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다.

이후 공주에서 2,000여 순무영 병력과 일본군 200여 병력이 동학군을 궤멸시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일본군이 합세하고 지휘하면서 미진하던 토벌 작전이 성공리에 완수된 것이다.

고종이 앓던 이 하나를 제거해준 덕분에 이노우에는 갑(甲)이 되었고 고종은 을(乙)이 되었다. 외세를 빌려 내환을 잠재우려한 고종의 무능함이 부른 자충수였다. 여기서 나는 남우충수(濫竽充數)를 발견했다.

이는 무능(無能)한 사람이 재능(才能)이 있는 체하는 것이나 또는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고종이 꼭 그랬다. 그 같은 고종의 일본 병력 요청으로 인해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국민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가? 일제의 한반도 점령과는 별도로 일본은 러일전쟁까지 벌였다.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던 러시아는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다.

마침맞게(?)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임시 피신한 사건) 등으로 러시아에 밀착하여 러시아를 한반도에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아도 시베리아 철도로 신경이 곤두선 일본이 안보 위기를 느끼게 만들고,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싸우라고 초청한 것과 다를 바 없게 된 셈이었다.

그 야심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도 한반도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다. 그러나 대마도 전투를 마지막으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자고로 임금이 무능하면 백성은 고초를 겪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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