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구詩] 2월 대나무 카페
[박석구詩] 2월 대나무 카페
  • 윤일선
  • 승인 2015.10.06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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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낙타, 박석구 시인 '2월 대나무 카페'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윤일선 ] 

   2월 대나무 카페
   -박석구-

암탉 한 마리
꺾인 피마자가 떨군 씨를 쪼다 갔다

대밭 언저리 곤궁이 가득한 호박이
댓잎차를 바닥에 겨우 깔고 썩고 있다

게으름을 끌고 온 고양이가 핥다 고개를 저으며
지나갔다

마른 개똥이 지키는 두더지 굴속에
사촌누이 눈물이 한 가득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녀는 지금 달래 하우스에서 일하는 중이다
동박새 무리가 수다를 떨다가
멍울진 동백꽃을 살피러 우르르 몰려갔다

치매 초입인 아버지는
6·25때 군대 안 갈려고 땅굴을 팠다는데

거기에 임화의 『현해탄』 시집을 두고 왔다는데
곰밤부리만 무성해지고 있다

작년에 벤 대 뾰족한 밑동을 밟아 통증이
눈물로까지 번져 내려다보니
철모른 지렁이 기어가고 있다

그제야 구름에서 비껴난 햇살이
버려진 댓잎들과 입을 맞추어댄다
 
( 2105, 『문학에스프리』 봄호)

박석구 시인: 수필가이며 시인이다. 2011년 『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천료 되었으며 2013년 『에세이스트』 ‘문제작가’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2015 『문학에스프리』에 시가 당선되어 활동 중이다.

詩評 -강대선-

무성한 상념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봄

2월은 봄이 오기 전, 혹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의 묵은 것들을 털어내야 하는 달이다. 시인은 아직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대나무 숲을 거닐며 일종의 의식을 치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나무 카페에서 시인의 상념을 따라가 보자.

시인은 피마자가 떨군 씨를 암탉이 ‘쪼다’가는 모습과 대밭 언저리에서 호박이 ‘썩고 있’는 모습과, 고양이가 고개를 저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물’로 상징되는 사촌누이의 기구한 삶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동박새 무리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6.25 전쟁 때 땅굴을 팠다는 아버지에게까지 시인의 상념은 이어진다.

‘6·25때 군대 안 갈려고 땅굴을 팠’던 아버지가 놓고 오신 임화의 『현해탄』은 어떤 시집이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1938년에 동광당서점에서 간행된 임화의 시집으로 일제의 탄압이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암흑기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이 스며있는 시집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이런 임화의 시집을 아버지는 땅굴에 남겨 놓고 온다. 남겨 놓고 올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아픔도 ‘곰밤부리만 무성해지고 있다’고 시인은 표현한다. 시인의 눈에는 모두가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그냥 보낼 수 없다.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 뾰족한 밑동을 밟’은 것이다.
그 ‘통증’으로 시인은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눈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가 임화의 『현해탄』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우리 민족의 겨울이 아니었을까. 우리 민족에서 동족상잔은 차디찬 겨울이었으니.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낼 마음을 ‘철모른’이라고 능청스레 말하고 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얻고 싶은 것일까.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수긍, 철모르는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저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제야 구름에서 비껴난 햇살이 / 버려진 댓잎들과 입을 맞추어댄다’를 통해 시인은 지나가는 아픈 역사와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가야 봄은 온다. 지나가는 것들에게 왜 슬픔이 없겠는가. 아픔이 없겠는가. 통증이 없겠는가.

하지만 철없는 봄은 그 모든 죽음 위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고 꽃을 피운다. 우리네 생도 이렇듯 통증을 지닌 채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다시 봄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시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도 이런 순수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삶이란 매번 ‘철없이’ 순수해져야 하는 것일 게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묵은 2월을 털어내야겠다. 아, 가을이 왔다. 철없는 시인을 만나러 대나무 카페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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